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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쿨의 선택

  • 제1화 이상한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 자본과 미제의 심장을 겨눠라!_김남주(하)

     김남주를 만난 지 25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그의 생가에 오니 그곳엔 농사꾼 시골집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뒷산을 업고 지어진 안채와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로 개조된 길가 쪽의 문간 집. 이 생가는 말하자면 전국 시인들의 생가 중에는 가장 젊을 것이다. 김남주가 태어난 것이 운명처럼 해방되던 해 1945년이니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일흔둘이다. 요즘에는 그 나이가 웬만한 경로당에서 청년 취급을 받고 있다는데, 그가 살아 있다면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안채 현판에 신영복의 휘호로 ‘민족 시인 김남주 생가’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서각 작품이 있다(‘고정희 시인 생가’는 신영복의 서체이긴 하지만 친필이 아닌 컴퓨터 한글 폰트). 안채 왼쪽으로 뒷산을 업고 세워진 김남주 흉상 옆에는 원형 벽이 있다. 그리고 거기 그의 절창 「조국은 하나다」가 철판에 새겨져 있다. 7연 80행에 이르는 긴 시다. 녹슬어가는 철판의 검붉은 색감은 비에 젖어 더욱 비장했다. 흉상 주변에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사랑은」, 「자유」, 「노래」 등 시비가 있는데 「조국은 하나다」가 주 조형물이다. 다른 시비들은 조형물에 그리 큰 노력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다. 시비의 글씨도 모두 컴퓨터 폰트의 궁체였다. 신영복이 궁체의 형식이 민중 문학의 내용을 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고 새로운 서체를 만들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가 얘기한 민중 문학의 주요 목록이 신경림·신동엽·박노해 등이었다. 신영복은 김남주의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그 특유의 민체로 썼다. 궁체가 불경을 쓰고 성경을 쓰기에는 그 우아한 분위기가 어울리지만, 그것으로 신동엽의 「금강」, 신경림의 「새재」,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쓴다는 건 유리그릇에 된장을 담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 새로운 서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나중에라도 김남주의 시비들을 다시 세우게 된다면 그때는 신영복 체로 하면 좋겠다. 지금 서울에서 또는 대전이나 공주에서 신영복 한글 서체를 공부하는 분들이 줄잡아 50∼60명은 될 것 같은데, 이들이 신영복 한글 민체를 익힌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해도 될 것이다. 시의 형식과 내용이 진화하듯 붓글씨의 내용과 형식도 진화하고 있다. 「조국은 하나다」는 사람들의 가슴을 때리며 1980년대의 기나긴 어둠에 비수처럼 날아든 시다. 그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두려움에 떨며 입조심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소시민 나에게 그 시는 섬찟한 시였다. 1959년생 내가 자라 온 한국 사회는 그런 사회였다.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교과서 내용과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간다는 현실의 공포를 함께 세뇌받아온 나에게 그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살던 동네 어른 하나가 유신 때 어떤 선거를 ‘개투표’라고 말했다가 경찰에 불려 다닌 적이 있었다. 그가 ‘개’가 한자 ‘개(皆)’였으며 따라서 ‘모두가 하는 투표’였다는 의미였노라고 주장하던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어렴풋이 어떤 모순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공포심을 내면화했다. 내가 어렸을 적 익힌 경찰의 이미지는 ‘무서움’이었다. 그 공포 언어의 목록에는 ‘순사’와 ‘상감’이라는 낱말이 있었다. 나중에 순사는 일제 강점기 용어이며 상감은 산감(山監)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 시절 산에 나무하러 갈 때마다 혹시 ‘상감’한테 들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함께 있어야 했다. 나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전까지 겨우 신문을 보며 비판적 언어에 가까스로 닿아 있었을 뿐이고 비로소 대학에 와서 ‘제국주의’니 ‘독재 타도’니 하는 언어에 닿을 수 있었다. ‘미제’니 ‘노동 해방’이니 하는 말들이 처음 내게 다가왔을 때 역시 섬뜩했다. 김남주의 언어는 내 머리에 언어의 혁명을 일으키는 회오리였고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피가 튀는 언어들이었다. 박노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5년에서 1988년까지의 시간, 김남주는 박노해와 함께 문학의 전위였다. 이른바 1980년대를 가로지른 거대 담론 NL과 PD를 상징하는 두 인물 김남주(NL)와 박노해(PD)는 모든 청년 문사들의 전설이었던 것이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세상 밖으로 내던진 시집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은 독재의 심장에 날아드는 화살과도 같았다. 숨죽이며 그 시를 읽는 나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시민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다. 김남주의 생가에는 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공간이 하나 마련되어 있는데 바로 김남주가 감옥에서 지냈던 독방을 재현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안채의 왼쪽 위로 대밭을 등지고 세워진 작은 구조물. ‘내가 수용되어 있는 사동은 소위 좌익수들이 감금되어 있는 특수 사동으로서 시멘트 복도를 사이에 두고 문패에 1.06평, 정원 3명이라고’ 하지만 ‘방에 딸린 변소(뼁끼통)를 빼면 0.7평 정도밖에 안 되’는 공간, ‘복도에서 가로 1m 세로 1.5m 철문을 끌어당기고 들어가면 비좁은 공간이 강요하는 압력 때문에 금방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공간, ‘방의 바닥이 세로가 1.5m 가로가 1m이고 천정은 2m 높이’로 ‘나같이 체구가 작은 사람도 한 방 가득 차’는 공간, ‘거기다가 방에 붙어 있는 뺑끼통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옥중연서』에서)’ 찌르던 공간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지금 화장실 냄새도 없는 그 공간에 조 선생님과 나는 서로 번갈아 들어가 보며 사진을 찍는다. 그가 「길」에서 ‘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 억압의 사슬에서 민중이 풀려나는 길이고 / 외적의 압박에서 민족이 해방되는 길이고 / 노동자와 농민이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다’라고 쓰며 투쟁의 의지를 단련하던 공간에서. 그가 유년의 천진함을 보낸 집 옆에 그의 몸과 문학과 사상을 가두었던 감옥의 공간을 나란히 대비시켜 놓은 것은 다른 문학관이나 생가에서는 볼 수 없는 김남주 생가의 특별함이다. 앞으로 김남주 문학관을 지을 계획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김남주 문학관은 김남주 생가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문학을 더 공부시킬 요량으로 몇십억의 예산을 들여 김남주 문학관을 짓고 거기 그의 삶을 담아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그가 바라던 세상의 모습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미 생가와 이 감옥만으로도 김남주 문학관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는 대나무처럼 청청하게 살다가 낫에 베이듯 스러졌다. 출옥 후 불과 5년이 지났을 무렵인 1994년,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가 많았으나 죽음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지 않으니 때가 되면 인정사정없이 데려간다. 아쉬움을 남기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마는 그의 죽음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의 삶의 선명함과 죽음의 난데없음이 어딘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인간이 누리는 보편적 수명조차 누리지 못하였고 그의 시의 전율을 더 느끼고 싶어 하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몇 가지 상념이 휘감아왔다. 문득 떠오른 것은 ‘아 김남주는 구질구질한 삶을 이어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1994년은 이른바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몇몇 운동가와 작가들의 변절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시절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형식을 갖추어가고 있었고 운동권들 상당수는 정치권으로 옮겨갔다. 1986년에서 1987년에 이르는 혁명적 열기는 직선제 쟁취로 변곡점을 지났다. 시민 사회는 변혁 운동 세력의 동력이 되어 주지 않았다. 직선제 정도로 만족한 중산층과 대중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갔고 운동 세력들은 여전히 사회 변화를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전처럼 활기차지도 신이 나지도 않았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하면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대중들은 염증과 기피를 섞어가며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시절이었다. 거기다가 김영삼이 노태우와 3당 합당을 하면서 민주주의는 드디어 기득권 세력의 장난감 정도로 가벼워지고 있었다. 김남주가 죽은 해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다음 해였다. 문민정부라 이름 붙여진 그 시절 타도해야 할 독재는 사라졌지만, 일상에서 독재의 잔재들은 아무것도 죽지 않았으며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시적이거나 폭력적인 탄압이 뒤로 숨어 들어갔을 뿐이었다. 반독재의 상징이던 김대중도 대통령 선거에 나서서 연거푸 두 번이나 떨어졌으니 이제 정부를 향한 모든 요구는 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힘을 얻지 못했다. 민주적인 제도 내에서 선거를 통해 사상의 자유도 쟁취하고 노동조합도 힘을 얻어야 하고 여성운동도 인권도 복지도 거리에서 외치는 함성만으로는 대중의 환호를 요구할 수 없었다. 근엄과 결연함과 목숨을 건 자만이 투쟁하던 시절에서 나처럼 겁 많은 소시민도 마구 정부를 비판하고 심지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대통령을 풍자해도 되는 그야말로 코믹한 시대가 된 것이다. 정치가 가벼워진 것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군부가 중심이 되던 지배 권력은 이제 자본과도 결탁하여 더 교묘한 방법으로 저항을 통제하고 길들였다. 김남주가 적개심을 불태우던 ‘미제’는 여전히 강고했고 대중들의 증오를 광범위하게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문학도 투쟁의 전선에서 서서히 퇴진해갔다. 그것은 시의 시대가 가을 산의 낙엽처럼 스러져가는 모습과도 같았다. 작가들은 다시 파편화한 개인으로 가거나 난해한 시의 골방에서 길을 잃거나 버렸다. 산문들도 ‘옛날에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 하는 후일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의 소소함이 혁명가에겐 너무나 지루한 나날들이 아니었을까.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조직도 파괴되고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부끄럽다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징역만 잔뜩 살았으니이것이 나의 불만이다그러나 아무튼 나는 싸웠다! 잘 싸웠거나 못 싸웠거나승리 아니면 죽음!양자택일만이 허용되는 해방투쟁의 최전선에서자유의 적과 싸웠다 압제와노동의 적과 싸웠다 자본과펜을 들고 싸웠다 칼을 들고 싸웠다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나는 싸웠다-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에서 민족 해방, 노동 해방, 미제 타도 등 거대 담론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던 사람이 긴 영어의 세월에서 풀려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일상의 사사로운 일들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물론 나의 소시민적 감상이다. 돌아오는 길 나는 다시 노래가 된 그의 시를 떠올려 본다. 햇살은 없고 가을비가 심하게 차창을 때린다. 감옥 창살에 비추던 다람쥐 꼬리만한 햇살로도 가슴 따스해지던 순간이 있었던 사람 김남주 시인. 안치환의 절절한 목소리에 실린 노래를 가끔 따라 부르며 시인의 목을 휘감던 햇살을 더듬어보곤 한다.

    시인 문학관 기행
  • 까치

     네가 차를 무서워할까 봐 차가 많이 다니는 고속 도로 옆에 집을 지었다. 네가 기차를 무서워할까 봐 가장 빠른 고속철 옆에 집을 지었다. 네가 굉음(轟音)을 무서워할까 봐 우르르 포탄이 구르는 고가 도로 밑에 집을 지었다. 네가 열 길 물속을 무서워할까 봐 폭포 옆에 집을 지었다. 모두 너를 위한 거다. 우리는 알에서 깨어날 때  작고 동그랗게 웅크려 있던 무서움마저도 다 부숴 먹었다. 까짓것 우리는 까치다.  어차피 우리는 헤어진다.  엄마 아빠는 죽음보다는 견딜 만한  이혼을 선택했다. 가족끼리는  말하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모든 아픔도 사랑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엄마 아빠 중 하나를 택하라. 언제나 틀린 답은 없다. 조금 덜 불행한 쪽만 있다.- 이정록, 「까치」* 소명여고 조권희 선생님의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너무 역동적인 사연이 많지만, 현재 저의 학급은 소소한 사연이 많네요. 아이들로부터 기억에 남는 내용을 받아서 '시'에 응모한 만큼, 잘 부탁드립니다. ^^)    처음에 고2에 올라올 때는 고2가 특별히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불화와 부모님 중 한 명을 택해야 한다는 선택이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할 줄은 몰랐다. 고2가 되어서인지, 집에서의 생활이 괴로워서인지 뜻하지 않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작년 반을 뒤로하고 새로운 환경에 처해서인가, 어색한 분위기를 맞게 되어서인가 이런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 친구들과의 친밀도는 높아지는 반면, 이상하게 학교생활을 하기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아빠로부터의 연락을 받았다. 아빠 회사가 부도가 났을 때 내가 태어나서 다시 살아갈 희망이 생겼었다는 말,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기억을 맴돌았다.    모든 것에 무기력해지고 살 이유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고, 아빠의 지지가 내게는 큰 힘이 되었다. 이혼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 안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온전히 나이기에 어서 이 고통을 벗어나고 싶다. 어느덧 아빠를 의지하며, 아빠를 하루하루 보고 싶은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창밖에는 비가 조금씩 내리는데 어느덧 야자 시작 조금 전이라 약간 바깥이 어두웠다. 커튼을 반만 쳤더니 비가 내리는 게 다 보였다. 교실은 에어컨을 약하게 틀어서 조금 추웠고 교실 뒷바닥에 누워서 친구들과 노래를 들으며 농땡이 부리던 평화로운 시간, 이 시간이 온전히 지나가기를, 그리고 집에서도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나날이 빨리 오기를…….

    맞춤 제작 시
  • 제2화 여유가 있으니까 그런 한가한 소릴 할 수 있는 거죠

  • 그나저나

     감자, 애호박, 미더덕, 바지락 넣어도 좋고, 안 넣어도 그만인 것들이 식어도 맛있는 된장찌개를 만든다.  양파, 홍합, 오징어, 박하지가 짬뽕의 마음이 된다. 종달새 미경이, 토끼풀꽃 선미,  머루알 금삼이, 빨강 채송화 종숙이.  그나저나 밥은? 그나저나 애들은? 그나저나 시어머니는? 그나저나 저나 그나 어때? 해도 좋고, 안 해도 다 아는 말이 응달 바람벽이 된다. 오목눈이 옥란이, 방아깨비 현숙이,  카멜레온 문희, 알 둥우리 은주.  애기원추리, 병아리난초, 은방울꽃, 씀바귀. 없어도, 있는 듯 향기롭고  있어도, 자랑하지 않는 꽃들이 그나저나, 그렇지 뭐. 입술 실룩대는 토끼의 슬픔과 고삐 묶인 염소의 아픈 되새김질을 다소곳이 풀밭에 누인다.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이 사람들이 팔 할의 장꾼이 되어 윷도 놀고 풍물도 치고 맥주도 돌린다. 삶은 파장으로 갈수록 아름답다. 흥정도 없이 서로서로 떨이해 준다. 파랑새 옥자, 달팽이 아가씨 혜진이, 햇병아리 현주, 타래난초꽃 상현이.  다 같이 놀자! 골목 아씨 현자. 혜진아 나와라. 숨바꼭질 끝났다. 우리는 모두 수다 학교 동창생들이다. 눈보라 치는 북향집에도  수다가 동창을 밝힌다. 그나저나, 세상에는 와도 그만, 가도 그만인 늙은 사랑이 꼭 붙어서  골목길 가로등을 환하게 밝힌다. 그나저나, 그렇지 뭐. 미더덕처럼 올통볼통한 입술을 내민다. - 이정록, 「그나저나」* 호곡중 류현자 선생님의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개성 넘치는 여고 동창생들과 함께 늙고지고> 여고 3학년 친구들이 오랫동안 연락을 못 하며 살다가 우연히 카톡 단체 대화방에서 만나 자주 일상사도 나누고 또 봄가을로 한 번씩 여행을 가며 만난 지 4년이 되어갑니다. 쉰이 넘어가는 나이지만 우리는 카톡 단체 대화방에서는 아직도 까르르 웃고, 어떻게 해? 어떻게 해? 하며 서로 걱정해 주는 영락없는 여고생들! 그러던 중 작년 연말에 제가 대화방에 있는 동창생 열두 명의 특성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상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으나 한 명 한 명 머릿속에 그려보며 즐거웠네요.    ‘3학년 4반 대화방 불 댕김상’ 미경이, ‘약한 것 같으나 실은 강한 이삔 여자상’ 금삼이, ‘눈물 나게 웃으며 잘 치고 잘 빠지는 인생 언니상’과  ‘감정 풍부 진심상’ 2관왕 선미, ‘발랑 까졌으나 귀여운 & 선한 사마리아인상’ 종숙이, ‘이리 봐도 미인, 저리 봐도 미인 최다 출석자 팔방미인상’ 옥란이, ‘예쁜 오지랖, 이리 번쩍 저리 번쩍 정길동상’ 현숙이, ‘깜짝 놀랐다 네 양파 본능상’ 문희, ‘강남 엄마 안 부럽다 강북 엄마상’ 은주,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내공 1,000점상’ 상현이, ‘꽃 복 터진 웰빙 라이프상’ 옥자, ‘깔깔 나비상’ 현주, ‘느림의 미학 신사임당상’에 빛나는 혜진,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 오지랖 하는 우윳빛 현자^^

    맞춤 제작 시
  • 풍경은 시를 배반하지 않는다_김남주(상)

     김남주의 흉상 앞에 섰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을 오후. 조각상은 거친 맛을 심하게 강조하여 제작되었는데, 지금 비에 젖어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다. 그의 삶이 투쟁의 빗물에 젖은 삶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광대뼈를 강조한 깡마른 모습은 스스로 ‘시인이 아니라 전사’라고 불리길 원했던 사람의 격렬함을 드러내고 있다. 조각상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 각도가 낮지도 높지도 않다. 아마 고개를 더 젖혔으면 애처로웠을 듯한데, 확고한 신념으로 목표를 향해 치닫는 사람의 형상이다. 또 다른 그의 흉상이 광주 중외 공원 비엔날레관 옆에 있다. 지난여름 들렀던 그 공원의 조각상은 여러모로 생가에 있는 조각상과 다르다. 우선 몸의 자세부터 어디에 기댄 듯 오른쪽으로 비스듬하다. 오른손을 귀밑에 대고 무슨 소리라도 들으려는 듯 고요하고 편안한 표정이다. 살이 약간 오른 얼굴에 옅은 웃음을 머금은 입가, 얼굴 피부의 겉 처리는 조각도의 흔적을 없애고 부드럽게 했다. 공원의 김남주는 눈빛 또한 따뜻하게 지상을 향하고 있어 그를 찾아온 사람의 눈과 마주하겠다는 각도다. 생가의 조각상은 안경조차 뿔테의 굵은 선을 한껏 강조했고 피부에서 띄워 놓아 자칫 건들면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반면 공원의 조각상은 안경을 피부에 닿게 안정시켜 놓았다. 몸을 부려 사는 노동자 농민을 너무 사랑해서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던진 사람! 1980년대라는 거대한 변화의 시대를 가로질러 달려갔던 불꽃! 어느 것이 김남주의 본질에 가까운 걸까. 중외 공원에는 조각상과 나란히 세워져 있는 「노래」 시비가 있고 생가의 조각상 옆에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시비가 있다. 시의 내용으로 보자면 공원에 있는 시가 전투적이다. 전투적인 조각상과 덜 전투적인 시, 전투적인 시와 덜 전투적인 조각상, 두 이미지가 교차하고 있다. 1박 2일 일정으로 나선 남도 문학 기행의 둘째 날 오후. 오전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들러보고 고정희 생가를 거쳐 도착한 김남주 생가는 먼저 본 곳과 너무도 다르다. 윤선도 유적지에 대비되는 곳으로 고정희 생가와 김남주 생가는 같은 위치에 있으리라. 대비되는 두 사물을 고찰해 보라는 듯 너무 다른 성격의 두 풍경을 보고 있는 셈이다. 고산의 집은 거대했고 김남주의 집은 초라했다(나중에 지도로 확인해 보니 김남주가 살던 봉학리 전체의 크기와 윤선도 유적지 터의 규모가 서로 10,000여 평 정도로 비슷했다!). 두 사람 다 당대와 불화하며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았으나 한 사람은 양반 집안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고 한 사람은 머슴 출신 소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감옥을 드나들며 투쟁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두 사람 다 권력과는 불화했지만 단지 양반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산은 거대한 저택과 원림 속에서 살았다. 권력 주변의 더러움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유배를 당했지만, 유배 기간 14년 5개월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녹우정과 보길도를 오가며 음풍농월하며 지내다 85세에 죽었다. 유배가 아무리 형벌이라고는 하나 일제 강점기에도 허락되었던 종이와 펜이 금지된 군사 독재 시절의 감옥과 비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김남주는 그런 감옥 생활을 9년 11개월이나 했다. 윤선도는 유배 생활 중 붓글씨로 국문학사에 길이 남는 한글 시조를 썼고 김남주는 감옥에서 칫솔을 날카롭게 갈아 우유갑이나 휴지에 시를 써야 했다. 시퍼렇게 날이 선 그 시도 국문학사가 존재하는 한 늘 거론될 것이다. 윤선도는 더 좋은 풍광을 즐기기 위해 인위적으로 숲과 산책로와 정자를 만들었다. 심지어 연못을 만들고 보기 좋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동자들에게 색동옷을 입혀 거닐게 하고 주변에 풍악을 울리게 하였다니 가히 그는 가진 자가 누릴 수 있는 오락의 극점까지 갔다 하겠다. 한 사람은 단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려서부터 뼈 빠지게 일하고 독재에 맞서 싸우다 수배되고 감옥에 갔다. 그리고 출옥한 지 얼마 안 되어 49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김남주 생가와 윤선도 유적지의 거리는 30리 안팎. 하루 사이에 이렇게 다른 두 인생 역정을 돌아보는 기행은 가을비보다 차고 쓸쓸하다. 내 글에서 다룬 시인 가운데 그가 살아생전에 내가 만나 본 유일한 인물이 김남주다. 내가 의욕적으로 쫓아다녔다면 서정주, 박목월, 조병화, 박두진 등은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20대 청년이 된 이후까지 살아 있었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를 직접 만나서 문학적인 그 무엇을 얻거나 확인할 필요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문학만 그러하겠는가. 철학자를 한두 시간 만나서 철학을 배우겠는가. 부지런히 다니면서 작가를 만나거나 강의를 듣지 않는 게으름, 또는 직접적인 관계보다 독서를 통한 만남을 신뢰하는 백면서생의 변명으로 삼기엔 궁색한 말이지만 나는 사람을 만나는 일에 별로 적극적이지 못하다. 그저 멀리서 그들의 소식을 듣고 시집을 보며 만났기에 대개 시인들의 모습은 정지된 사진의 이미지 정도로만 내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러니 내가 김남주를 생전에 한 번이라도 만난 것은 특별한 경험이라 하겠다. 그것도 네댓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며 그가 풍기는 인간적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내가 전교조나 민예총에 관계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작가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느낀 아쉬움 중 하나는 어떤 작가들의 경우 직접 만난 후 작품의 맛이 반감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관이나 생가 기행은 그렇지 않다. 시의 배경은 시를 배반하지 않는 것 같다. 시인이 태어난 집, 시인이 살던 마을, 시인이 보고 거닐었을 들과 산과 골목은 시인의 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시의 서정을 확장한다. 풍경은 시인 이전의 것들이라 그런 걸까. 윤동주의 고향 용정 가는 길에 동행했던 평론가 홍용희 교수는 ‘좋은 시는 여섯 살 이전의 언어로 만들어진 시다.’라고 말했다. 문학관이 있는 곳은 시인들의 여섯 살 이전의 언어가 가득한 풍경화다. 김남주 생가는 김남주가 태어나 살았을 어린 시절의 모습을 다른 어떤 생가보다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비록 과거의 초가지붕은 검은 양철 지붕으로 바뀌었지만, 가옥 자체를 새로 지은 것은 아닌 듯했다. 김남주의 아버지가 마련한 집은 그 아버지가 마련했던 집이다. 아버지의 성화에 날이 새기 무섭게 들판으로 일하러 가야했던 김남주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살던 집, 70세가 되어서도 밭에 나가 일을 했던, 애꾸눈 각시였던,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 대학생 때 유신에 반대하는 첫 지하신문 「고발」을 제작하여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후 29세의 나이에 돌아와 「진혼가」 등의 시를 지은 집이다. 그리고 그가 30세, 고향을 떠나 광주로 가서 서점 카프카를 개설하고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더는 고향에 와 머물지 못했다. 전사로, 시인으로, 번역가로 뜨겁게 살다 폭발하듯 죽었다. 내가 김남주를 만난 것은 1990년 무렵이었다. 영동 출신 시인이자 민예총 활동가로 당시 전국을 누비고 다녔던 양문규가 김남주를 영동에 모셔 왔다. 그 무렵 김남주는 종종 영동에 왔었다고 한다. 나까지 셋이서 박운식 시인의 집인 황간면 용암리에 들러 저녁을 먹고 용산으로 나왔던 일정이 있었다. 왜, 무슨 일로 갔는지 알 수 없고 다만 용암리에서 용산으로 나왔던 그 밤길만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추억이라고 말하면 좀 궁상스러울까. 그의 목소리는 맑았고 목 안쪽에서 나는 낭랑한 저음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성은 대체로 목 바깥쪽에서 나는 소리다. 영어는 주로 목 안쪽에서 소리가 나는데 우리말을 그렇게 발음하는 김남주 시인은 좀 특별한 경우이다. 나는 그의 음성에서 선동적인 감수성이 묻어나온다고 느꼈다. 핏대를 올리며 선동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보통의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무언가 강력한 힘을 가진 듯이 울려왔다. 지금 추측해 보니 그가 몹시 바쁜 중에 영동에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양문규가 김남주를 박운식의 집에 안내한 것은 그가 당시 농민 시를 쓰는 시인 중에 거의 유일하게 실제 농사를 지으며 사는 분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1988년 출옥 후 바쁜 일정으로 전국의 시민사회단체와 운동권 사람들, 시인, 독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중이었던 김남주의 마음에도 닿을 만한 진짜 ‘농투사니’ 시인이 박운식이었으니까 말이다. 밤길을 걸으며 나는 당시 유행했던 노래를 불렀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 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나는 그 무렵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고 있었다. 전교조 활동으로 한참 교육 운동에 열이 달아 있던 때였다. 그날 가사의 어느 부분인가를 까먹고는 다 부르지 못하고 흐지부지했다. 노랫말은 생가의 시비에 있다시피 원시와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런데 김남주의 말이 뜻밖이었다. “아, 그 시가 노래가 되았는지는 몰랐는데…….” 영동 황간면에서 용산으로 가는 밤의 들판 가운데 길이었다. 정작 시인 자신은 그런 노래가 불리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게 좀 뜻밖이었지만 그게 뭔 상관이랴. 낮고 맑은 음색의 선뜻한 그날 그 목소리는 지금도 내 귀에 쟁쟁히 살아 있다. 나중에 김남주의 육성 영상을 찾아보니 그 서늘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시인 문학관 기행
  • 제3화 껍데기는 가라

  • 꿀꿀

     그을린 옥수수 뿌리 같이 수염이 덥수룩한 할아버지가 혹시, 그쪽도 돼지를 기르시나? 묻는다. 제사상 돼지머리처럼  빙긋이 수염자리만 긁고 있었더니, 돼지는 수염만 봐도  식구인 줄 안다고 따라 웃는다. 눈인사만 건네려다가 멧돼지 같은 놈들과 살 비비며 사는 고등학교 선생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박철주가 손자 돼지라며 덥석 손을 잡는다. 방학 때 아니라도  돼지털 시대니까 수염을 기르란다. 공부는 어찌 가르치는지 모르지만 수염자리 하나는 멋지다며  연거푸 막걸리를 따른다. 늙은 씨돼지 두 마리가  오래도록 삼겹살집에 앉아  새끼돼지 자랑에 꿀꿀거린다.- 이정록, 「꿀꿀」* 천상고 손규상 선생님의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교사와 학부모 어제는 딸 연우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준비한 ‘아빠와 함께 떠나는 북 캠핑’에 다녀왔다. 아이가 미리 가지고 온 가정통신문에는 편한 옷차림 말고는 어떤 준비도 필요하지 않으며 특별한 저녁 식사가 마련되어 있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유치원이 집과 가까운 거리라 아이의 손을 잡고 동네 사이를 한가롭게 걸어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선생님들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고 자리를 안내했다. 정원 한 켠에서는 선생님들이 땀을 흘리며 고기를 굽고 있었고 또 다른 선생님들이 구워진 고기를 자리로 날랐다. 특별한 저녁 식사라고 하기에 아이와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예쁜 도시락 정도를 생각했던 나는 선생님들의 감정 노동에 다소 불편했다. 여기에 겹쳐지는 비슷한 풍경이 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매년 5월 교내 체육행사를 바비큐 파티로 마무리한다. 거기에 붙는 제목도 근사하게 ‘사제동행 바비큐 파티’이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고기를 구워 먹으며 서로를 도닥이는 자리이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학부모님들이 함께 자리하기 시작했다. 학부모님들이 고기를 굽고 교사와 학생들은 그 고기를 받아 먹는다. 내가 고기 굽는 자리를 차지하려 해봐도 학부모님들은 완강하다.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교사로서 학부모님과 삶을 나누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 나도 학부모님을 만나다 보면, 동네 형님으로 만나서 사는 이야기 나누면서 맥주 한 잔 나누고 싶은 학부모님이 분명 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내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 대한 조언을 받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다.

    맞춤 제작 시
  • 문학과 정치, 누가 더 강한가_오장환(하)

     오장환은 낯선 이름이다. 문학계에서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문학관을 찾는 이들에게조차도 오장환은 그리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최근에는 그의 시가 대학 수학 능력 시험에도 출제되고 있긴 하지만 그동안 내가 거쳐 온 중고등학교 과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에서도 좀체 만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문학사를 기술할 때도 오장환은 그렇게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오○환’이라는 등의 이른바 금지 문인 이름에도 많이 오르내리지 않았다. 해방 직후 1947년 중학교 교과서에 그의 시 「탑의 노래」가 실렸지만, 그것이 대중의 기억에 남아 전해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낯선 이름이 나의 인식 속에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은 1996년에 오장환 문학제가 시작되면서부터다. 문학제가 치러지고 생가비가 세워지는 과정, 문학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틈틈이 그 소식을 듣고 때로 참여하기도 했다. 오장환을 시인의 길로 이끈 스승이자 옆 동네 선배였던 정지용의 경우 1988년 납·월북 작가에 대한 금기가 풀림과 동시에 바로 문학제가 열리고 뒤이어 시비가 세워지는 등 활발한 기념사업이 전개된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해금된 지 8년이 지나서야 문학제가 시작된 것도 그렇고 문학관이 2006년에야 개관한 것만 보아도 문단 안팎에서 오장환에게 보낸 관심이 그리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활동했던 서정주나 이상, 이육사 등에 비하면 턱없은 무명이었다. 더구나 그는 당대에 ‘문단의 새로운 왕’이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주목할 만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 주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른바 해방 공간에서 북한을 선택하여 간 ‘월북 작가’에 포함된 경우, 말하자면 논란의 시비가 없이 확고한 ‘빨갱이’였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모두 입을 다물어야 안전한 시절이었으니까. 다른 하나는 인기 있는 작품이 없었다는 것, 오장환 문학이 이룩한 성취가 특별한 것이긴 하지만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준 작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른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6·25 전쟁 후 오장환의 이름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82년 오송회 사건 때였다. 간단히 말하면 ‘죄 없는 시민을 빨갱이로 만든’ 사건이었다. 불길한 이름은 계속 불길한 이름으로 남한 사회에 각인되었다. 말하자면 근대의 시작과 함께 불온했고 21세기인 지금까지 ‘빨갱이’는 불길한 단어이다. 그 단어는 조선 시대의 어휘 ‘반역자’의 현대 번역어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 낙인용 어휘는 ‘종북’이나 ‘포퓰리즘’이라는 명찰을 달고 계속 우리 사회를 들쑤시고 있다.    아기의 입놀림을 ‘옴줄옴줄’이라고 원고지에 펜을 꼭꼭 눌러 썼던(「애기 꿈」) 손, 누나가 그리워 살구도 따 먹지 않고 한나절 가슴 저리던(「편지」) 서정을 우리는 영원히 곁에 두기 어려운 걸까. 저 섬세하고 여린 감수성의 문장이 체제에 불온한 걸까. 정치 권력은 영원히 그 어느 한편에 ‘불온’이나 ‘가상의 적’을 만들어 놓고 싶은 모양이다. 까발려진 들 체제에 별 영향도 없는 것들을 ‘불온’으로 과대 포장하고, 실제보다 훨씬 크게 부풀려진 ‘가상의 적’을 수시로 꺼내 들면서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내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나 보다. 그런데 이승만을 추종하는 세력이 보기에 좀 기분이 나빴는지 모르지만,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이 교과서에 실린 이후에도 남한 사회는 별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다.    동시, 산문시, 자유시 등 작품마다 내용과 형식을 조금씩 달리하긴 했지만, 오장환은 일관되게 인간을 위한 문학을 우선했다. 그는 ‘참다운 인간’의 시선으로 시대와 사회를 보려 했다.    공장 속에선 무작정하고 연기를 품고 무작정하고 생산을 한다. 끼익 끼익 기름 마른 피대가 외마디 소리로 떠들 제 직공들은 키가 줄었다. 어제도 오늘도 동무는 죽어 나갔다. 켜로 날리는 먼지처럼 먼지처럼 산등거리 파고 오르는 토막들 썩은 새에 굼벵이 떨어지는 추녀들 이런 집에선 먼 촌 일가로 부쳐온 공녀들이 폐를 앓고 세멘의 쓰레기통 룸펜의 우거(寓居)―다리 밑 거적때기 노동 숙박소 행려병자 무주시(無主屍)―깡통 수부는 등줄기가 피가 나도록 긁는다. - 「수부」에서   장시 「수부」의 한 곳, 수부란 서울을 말함이다. 도시로 몰려든 농촌 이탈민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를 그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하 1930년대 후반 서울은 공장이 늘어나고 인구가 급격히 불고 있었다. 오장환은 어둡고 풍자적인 어조로 도시의 비참함을 그렸다. 이 시를 쓸 때 그의 나이 열 아홉. 천재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그 나이에 전쟁을 묘사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지금의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얘긴데 전쟁을 그렇게 그리고 있었다니! 인간의 목숨과 캠플 주사(심장마비 방지 주사)가 동격으로 취급되는(「전쟁」) 모습, 그가 읽은 시대와 인간 세상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아수라였던가.    오장환이 집중한 것 가운데 전통 사회의 모순과 동시에 전통 사회의 따뜻함이 있다. 신분 사회의 부조리와 여성 억압의 허위성을 파헤치거나 족보와 가부장제를 존숭하는 전통 사회의 허상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라고 「성씨보」에서 노래하고, 「정문」에서는 유교적 가치가 조선 땅에서 어떻게 일그러져 한 여인을 자살로 내몰고 지배층은 그 위에 다시 어떤 야만을 행하는지 보여 준다.    그리고 어느 인간이 안 그러랴마는 오장환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가 해방 공간에 펼친 열렬한 인민 문학 운동과 이상 사회를 향한 열정적인 활동은 전통 사회에서 경험한 따뜻함, 곧 어머니로 표현된 희생과 헌신의 사람들에게 올린 헌사이다. 기존 전통 사회의 현장인 고향은 모순이 가득 찬 곳이지만 그 모순의 질곡을 지고 살아가는 어머니는 늘 희생과 온화의 얼굴로 오장환을 감싼다. 오장환은 자신과 자신의 시가 어떤 운명을 걷게 될지 예측했을까. 해방과 함께 오장환은 해방 전에 쓰던 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열정적으로 현실주의 문학에 매진한다. 새로운 나라 건설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해방의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모순의 족쇄가 가득하던 식민지가 끝나고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걷어낸다면 그곳에 전쟁도 없고 신분 차별도 없고 노동의 소외도 없는 모두가 행복한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에 전율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해방 공간에서 그의 열정적인 활동은 극우의 테러를 당하고 결국 오장환은 북한을 선택해 간다.    북한으로 가면서 남한에 대한 기대를 접었을 테니 그는 적어도 북한에서 시집 『붉은 기』를 낼 때까지는 제 죽음과 함께 자신의 시가 북한 문학사에서 그렇게 깨끗하게 지워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되레 그가 버리고 떠난 남한에서 그의 기념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가 북한을 선택하여 갈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당시 북한이 그를 받아들일 만큼의 ‘인민’ 중심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었고 남한은 ‘자본’ 중심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북한은 인민의 범위를 점점 좁혀 들어가 그가 찬양했던 중심 권력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제거하면서 임화를 비롯한 월북 문인들을 숙청하고 그들의 작품조차 지워버렸다. 오히려 자본의 파이가 커진 남한은 인민의 힘도 함께 커져서 이제 오장환의 ‘인민’ 정도는 품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98살이다. 지난주(9월 22일~23일) 오장환 문학제가 열렸다. 2018년 탄생 100주년 문학제가 준비되고 있다. 그의 빛나는 감수성은 지금 어디 있는가.

    시인 문학관 기행
  • 제4화 나, 감정이 메마른 건가

  • 노래가 끝나는 날 아름다운 꽃이 핀다 했는데_오장환(상)

     남한에서 유일한 월북자의 문학관. 6·25 전쟁 전에 월북하여 북한에서 죽은 시인의 문학관이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에 있다. ‘오장환 문학관’이다. 오장환 문학관에 관한 설명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다양한 반응을 동시에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오장환 문학관은 오장환의 ‘문학’을 기리는 곳이다. 오장환의 말처럼 제대로 된 문학은 ‘문학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문학’이고 우리는 그 ‘인간을 위한 문학’을 오장환의 문학 작품 속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좀 특별한 기행이었다. 그동안 주로 혼자 가거나 몇 사람의 지인들과 동행했다. 이번에는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모았다. 처음엔 대전의 시민 단체 레츠(대안 화폐 운동을 하는 문화 공동체) 회원들과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옥천과 대전 그리고 청주에서 참가한 사람들이 있어 스무 명이 좀 넘었다. 교사, 만화가, 건축학과 교수, 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최근에 동학 관련 책을 낸 고은광순 씨(옥천군 청산면 귀촌)가 참여해 보은군과 동학에 관해 잠시 설명해 주셨다.  오장환 문학관에는 임선빈이라는 수필가가 있다. 오장환 문학관이 만들어진 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그곳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다. 마치 오장환의 연인처럼 엄마처럼 거기 살고, 문학관 방문객들을 애인이나 자식이라도 맞이하는 듯이 반긴다. 직접 따 만든 국화차를 끓여 내오거나 직접 기른 옥수수, 감자, 고구마를 쪄 내오는 일이 어찌 간단한 일이겠는가. 더구나 그는 문학관 주변을 직접 관리하고 가꾼다. 전국 문학관 어디에도 이런 예는 없다. 대개의 문학관에는 업무를 보는 분들이 계시다. 멋있게 해설하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분을 만날 수는 있지만 방문객을 자신의 낭군처럼, 집 떠난 자식이 돌아왔을 때 반기던 어머니처럼 맞이해 주는 곳이 있던가. 이번에 갔더니 밖으로 떠돌다 돌아온 탕자를 맞듯이 마당에 가득한 해바라기가 환하다. 그리고 그 해바라기를 심고 가꾼 임선빈 씨가 해바라기보다 더 환하게 문간에서 나와 방문객들을 맞는다. 오장환이 「다시 미당리」에서 노래한 어머니의 모습이 이와 비슷했을까. 오장환 문학관은 그래서 사람이 살고 있는 집과 같다.  이번 방문 전 나는 오랜만에 사전 연락을 드렸다. 미리 연락을 하고 가면 너무 융숭하게 환대해 주시는 게 좀 부담스럽고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연락을 안 드리고 깜짝 방문을 했던 적이 있는데 얼마나 화를 내시는지 무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옥수수를 한 소쿠리 쪄 내오시지 않았던가. 나는 다시 감동하면서 부담과 압력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스물이 넘는 우리 일행이 모두 두세 개씩이나 먹고도 남는 양이었다. 다음에 갈 땐 연락을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거 원. 임선빈이라는 사람이 있어 오장환 문학관은 살아있고 오장환 생가는 진짜 살아있는(生) 집(家)이 되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지금부터 40여년 전에 회인면에 온 적이 있다. 나는 구미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방학을 이용해 같은 반 친구를 찾아 왔던 것이다. 얼마 전 그 친구와 소식을 주고받으며 확인했더니 공교롭게도 현 오장환 문학관 자리가 그 친구의 집터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문학관 자리에 40여년 전 내가 왔었다는 얘기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내리다 친구의 집에 닿았던 기억이 있다. 전에 와서 하룻밤을 머문 옛 친구의 집과 문학관이 겹쳐지는 곳에 들어서는 그 묘한 심사라니!  산골 마을이다 보니 마을의 환경이 대도시처럼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문학관 주변의 집들 가운데 여전히 예전의 돌 담벼락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도로가 넓어지고 차가 늘어나고 시멘트 건물이 생기고 젊은 사람들이 떠나가는 등의 변화는 우리나라 모든 마을이 겪은 변화이지만 이곳은 지금도 궁벽진 시골 마을이다. 몇 년 전 청주―상주 간 고속 도로가 뚫리면서 회인 나들목이 생기고 교통이 편리해지긴 했다. 그래도 옥천군에서 회인면에 닿으려면 해발 300미터가 넘는 수리티재를 넘어 한 시간 가까이 차를 달려야 한다. 안남면을 거쳐 가는 동안의 산세도 그리 얌전한 것만은 아니다. 40년 전 이곳에 오기 위해 아마 나는 하루를 다 소비하지 않았을까. 청주시로 갔는지 보은군을 거쳐 갔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다만 비탈길을 내려가는 버스에서 바라보던 언덕 아래 초가집 풍경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뭘까. 그때까지 그렇게 큰 산을 버스로 넘어 다닌 적이 없었다는 게 한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나는 그 나이 때까지 내가 살던 곳 옥천을 벗어난 적이 전혀 없는 촌놈이었다. 수학여행으로 서울의 남산과 경주의 불국사를 다녀온 것이 내 여행의 전부였던 것. 오장환이 살던 당시 이곳은 내륙의 오지 중 오지였고 그래서 더 평화롭고 아늑한 곳이었으리라.  마을 앞으로는 피라미 몇 마리가 아이들을 유혹할 만한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동북쪽 국사봉과 구룡산 사이에서 흘러오는 물이다. 박인환의 고향 강원도 인제군과 같은 험준함은 아니지만 오장환의 고향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오장환이 이곳에 산 것은 보통학교 3학년 때까지다. 그때 그의 성적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미술 쪽이었다고 한다. 그가 10살 때 온 가족이 이곳을 떠나 오씨의 선산이 있는 집성촌 안성으로 간다. 그곳에서 박두진과 한반이 되어 안성보통학교를 다니고 14살 때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운명의 정지용을 만난다. 오장환의 생애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잦은 이동이다. 이는 그의 시에서 보헤미안의 감성으로 나타난다. 그는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18살에 일본으로 간다. 19살에 다시 서울로 왔는데 20살에 다시 일본 명치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것도 중퇴하고 21살에 다시 서울로 온다. 23살에 다시 일본으로 갔다가 얼마 후 되돌아온다. 18살 때 처음 일본에 가서 다닌 학교는 지산중학교라고 하는데 1년짜리를 수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교 생활도 전반적으로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도 당시로서는 아주 늦은 30살에 하게 되는데 서정주는 오장환이 스무 살 때 1년 정도 살았던 여인이 있었다는 증언을 했다는데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고 한다. 그의 삶에 어떤 알 수 없는 떠돎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떠남과 돌아옴의 이미지, 방황이나 방랑하는 자의 눈으로 보는 세상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 안착하지 않은 것 같은 쓸쓸함, 그가 어떤 대상을 향하여 격렬하게 환호하며 지지를 보내는 정서는 해방 후 북한, 러시아를 거치는 기간에 쓴 시들에 나타난다.  어린 시절은 그리 궁핍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휘문고보 다닐 때 수업료를 내지 못해 정학처분을 받을 것을 보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고급 취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돈을 다른 곳에 탕진했거나 집안이 어려워졌을 수 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직접 돈을 벌어야 했고 신문 배달도 했다고 한다. 그가 가진 직업은 남만서방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한 것 정도였는데 여기서 서정주의 『화사집』과 김광균의 『와사등』이 나왔으니 문단에 중요한 시집을 낸 셈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오장환 사진이 한 장 있다. 큰 깃을 가진 두툼한 외투 속, 얼굴의 각도가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채 포마드를 바른 듯 단정히 빗어 올린 머리와 넥타이. 지금은 보기 힘든 스타일이다. 오장환은 잘생겼다. 요즘말로 하면 꽃미남이다. 이미 죽어 없어진 사람의 얼굴을 그것도 사진을 보고 말하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오장환은 예쁘장한 귀공자 얼굴이다. 성격파 배우 역에 알맞을 김수영이나 시원시원한 북방의 남성성을 풍기는 백석, 미남형이지만 눈꼬리가 쳐진 박인환과는 차별되는 도도함과 귀여움이 오장환의 얼굴에 있다. 윤동주의 눈빛에 서린 슬픔의 그림자도 그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삶은 꽃처럼 아름답지도 않았고 귀공자처럼 귀함을 받지도 못했다. 그는 방황하며 때로는 현실과 싸우며 치열하고 뜨거운 순간들을 살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34살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러나 그는 대체로 현실적, 개인적 호사와 욕망에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던 같다. 이 세상과 사회를 보다 이상적인 어떤 곳으로 바꾸어야 하고,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민한 촉수로 자신의 시대 대부분의 조건들에 관해서 날선 비판의 시를 쓰며 이상적인 그 무엇을 위해 고민했다. 그는 신분을 차별하고 여성을 억압한 봉건 이데올로기, 식민지 현실, 제국주의, 전쟁, 근대 도시의 비인간성을 비판했다.  스무 살 무렵 ‘문단의 새로운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해방 전 글 속의 오장환은 대체로 쓸쓸했다(모든 왕들이 쓸쓸했나?). 1940년대 민족의 암흑기엔 글을 쓸 수 없었고 해방 후에는 열렬히 현장 문학에 매진했으나 곧 극우의 테러를 피해 북한으로 가야 했다. 병든 몸을 치료해 준 북한 정권은 그에게 축복이었고 치료차 갔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에 열광했지만 곧이어 닥친 6·25 전쟁은 그의 몸을 돌보기엔 너무 혼란한 격류였다. 그가 죽고 전쟁이 끝난 후 남한에서는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그에 관한 금기를 풀었고 차츰 다양한 연구와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도 북한에서는 그의 문학을 별로 취급하지 않고 있으며 이름 석자 거론하는 정도라고 한다(하긴 우린 지금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다. 아! 나도 깜빡 잊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남(연합군)과 북(중국)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또는 정전) 상태다. 대한민국은 협정에 서명도 안했다.).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예 흙이 향그러 단 한번나는 울지도 않었다. (중략) 단 한번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그를 좇아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나의 노래」 중에서  그의 노래는 끝난 것일까. 지금 그의 무덤은 어디이며 거기 꽃은 피었을까. 어둡거나 쓸쓸한 기색 없던 그의 얼굴 어디에 그의 짧고 격렬한 삶의 이력을 겹쳐 볼 수 있을까.

    시인 문학관 기행
  • 다시 창문을 열며

     모래 폭풍 몰아치는 사막을 걸어 너는 갔다 모래바람에 묻혀 지워지는 너를 보았다 생을 향해 이글거리던 완전 연소의 불꽃으로 연기도 재도 남기지 않은 그리하여 네가 가 닿은 곳은 어디냐 바람이 분다 너의 숨소리를 듣는다 뜨는 별에서 네 눈망울을 본다 네 미소로 해가 솟는다 여기에 네가 있었구나 비로소 네가 닿은 그곳이 여기 우리 가슴인 것을 알겠다 너는 이 세상 우주에 가득하구나 초록으로 오는구나 눈으로 오는구나 가랑비가 되어 오는구나 살아야 할 이유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알려주듯 지금은 없는 네가 내 곁에 있구나 내 안에 있구나 헤어짐은 이렇듯 하나가 되는 일이었구나 우리 갈 길이 모래 폭풍 속일지라도 이제 못 갈 일도 없겠다 너 내 안에 숨 쉬고 있으므로 나 오늘 다시 창문을 연다 내일은 네가 뿌린 씨앗들에 물을 주겠다- 복효근, 「다시 창문을 열며」*계산여고 이정희 선생님의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3월 20일 새벽 두시 반에 사랑하는 막내 여동생이 어린 두 딸을 두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화장장에서는 꽃을 시샘하는 봄눈치고는 꽤 많은 함박눈이 펑펑 흩날렸습니다. 딱 2년 전 3월 20일 쯤, 계산여자고등학교로 옮기고 3학년 3반 아이들의 담임이 되어 정신없이 바빴던 그 때 동생이 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수업 때문에 바로 동생에게 달려가지도 못하고 교무실에서 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주변 선생님의 염려도 귀에 잘 들리지 않고, 아이들의 걱정스러운 눈동자들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동생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도 잘 알지 못했지만, 모두들 정신을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장녀인 내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제부가 동생을 데리고 여기저기 병원을 옮겨 다닌 끝에 그렇게 생소한 급성 T림프성 혈액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엄마, 아빠와 저 그리고 둘째 여동생은 걱정과 염려와 슬픔으로 남겨진 어린 아이 둘을 돌보고 돌아가며 병원에 가서 간병을 하며 보냈습니다. 고 3 담임으로 아이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여학생들이라 예민한 감정을 많이 다독여 주어야 했지만, 병원에 가서 아픈 동생을 보고 오면 쓰라린 가슴 때문에 수업 시간에 이별시라도 가르칠 때면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습니다. 1년 동안 제 슬픈 감정으로 주변이 우울해 지는 것 같아 3학년 3반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교무실에서도 다른 선생님들께 너무 미안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졸업식에서 바라 본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밝지 못한 것 같아서 씁쓸하고 마음이 아파, 울면서 아이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아픈 마음을 배려해 주어 작년에는 담임을 맡지 않았습니다. 동생도 항암을 끝내고 골수 이식을 하고 왠지 희망이 생기고 해서 암이 재발하기 전까지 새로 맡은 새학년의 아이들에게 정도 듬뿍 주고 학교에서는 동생의 일을 잠깐 잊고 웃으며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동생이 금방 암이 재발되고, 바쁜 와중에 제부가 살려 보려고 한국의 큰 병원을 다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저도 사람인지라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해도 금세 일희일비하는 제 자신을 보며 자탄하다가도, ‘냉정해지자, 슬픔을 극복해 내던 많은 이들처럼 내게 일어난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설마 아직 내 동생은 너무 젊은데 이겨내겠지.’ 이러며 스스로 달래보고, 동생의 투병 생활에 힘이 되려고 주말이면 부지런히 동생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두 해 동안 저는 제가 시간을 앞질러 가는 것 같았습니다. 충격이 크신 엄마, 아빠도 걱정되고, 어린 조카들도 걱정되고, 고만고만한 두 아들을 키우는 둘째 여동생도 걱정되고, 일하랴 병간호하랴 자기 몸을 못 챙기는 제부도 너무 걱정되었습니다. 항암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나면서 슬슬 병원비도 걱정되기 시작하고, 일흔이 넘으신 부모님도 걱정되었지만, 가장 걱정이 됐던 것은 막내 동생이 병원에서 그렇게 오래 입원하고 치료하고 다시 이식 받고 하는 반복의 과정에서 자꾸 더 아파지고 입원 기간도 길어지고 더 항암을 할 수 있는 체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는 계속 두 달밖에 남지 않았어요라고 하지만 동생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을 위해서 그 무시무시하게 아프다는 항암을 마지막까지 받아가면서 정말 살고 싶어 했습니다. 엄마 품이 아직은 너무 그립고,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둘째 다인이를 조금만 더 키워 놓고 갔으면 하던 힘없는 동생의 목소리,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자신의 생명이자, 보물이자, 사랑이라고 말하던 첫아이의 이름을 말라비틀어진 혀로 ‘이랑아이랑아이랑아’라고 외쳐 부르던 소리가 아직도 제 귀에 선명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살고 싶어 하는 동생에게 차마 더 살 수 있다고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기만하는 것 같아서.. 그러나 지금 후회합니다. 방학 동안에 같이 있으면서 더 잘 해 줄 걸. 아프기 전에 동생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도와 줄 걸. 사랑한다고 더 많이 얘기해 주고 아직도 나 예쁘냐고 물을 때 당연하지 네가 제일 예뻐라고 진심을 다해 말해 줄 걸. 개학이 되어서 학교로 돌아갈 때 동생이 그렇게 붙잡았는데, 가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가버리라고 하니 진짜 그냥 와 버린 것이 죽을 것처럼 가장 후회됩니다. 올 3월만이라도 그냥 함께 있어 줄 걸. 나중에 팔, 다리가 모두 마비되고, 혀도 안 움직이고 급기야는 눈도 멀고, 대뇌까지 암이 퍼졌다고 했을 때는 이미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아파보이는 동생이 불쌍하고 가엾어서 가만히 동생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지었습니다. 이제 가도 돼 정희야.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너무 이기적이고 무능했던 언니가 너무 미안하고, 정말 사랑하고 우리랑 살아줘서 고마워. 우리 가족들 모두 너를 사랑하고 이제껏 표현하진 않았지만 네가 태어날 때부터 널 사랑했었어. 더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손 쓸 수 없는 순간 숨이 한 고개 두 고개 넘어 갈 때 네가 하루라도 더 살 수 있기를 희망하지 못해 미안해. 네 아픔의 일도 나눠 갖지 못하고 내 아픔에만 괴로워해서 미안해. 동생이 잠깐 저를 보고 웃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후에 먼저 가 있어라. 나도 가마. 그때 널 꼭 찾을게. 그러며 피딱지가 앉은 동생의 마른 입술에 놓여 있던 거즈가 무거워 보여 들어내는 순간 동생은 마지막 숨을 삼켰습니다. 그 순간 목 놓아 울고 싶었는데, 쉰 목에서는 제 맘처럼 소리도 나와 주지 않았습니다. 만 서른여섯 너무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정말 착하게만 살아온 동생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만 남았습니다. 아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지만 그냥 또 살아있는 죄로 살아갑니다.  학교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즐거운 척, 신나는 척 이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래도 가끔 우울한 그림자가 가득해도 표 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저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나 봅니다. 솔로로 살며 늘 철이 없던 내가 언제 어른이 되나 했더니.. 흰머리 듬성듬성해진 사십 대 중반에 인생에서 가장 큰 사막을 건넌 듯합니다. 앞으로도 건너야 할 모래 폭풍이 인생에 많이 남았겠지요. 수많은 시에서 보았던 이별의 성숙을 이뤄 보려고 애쓰며 참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깊고 넓어진 마음으로 대하려고 합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 지 생각해 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하며 더 좋은 선생님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아직은 가슴의 구멍이 커서 감정이 들쑥날쑥 한데, 그냥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좋은 우연이 인연으로 되어 만난 선생님께 글을 띄웁니다. 감정이 복받쳐 쓴 글이라.. 좀 엉망입니다. 그래도 좋은 시로 만들어 주신다니 평생 보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좋은 기회를 주시고 좋은 인연을 맺게 해 주신 창비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맞춤 제작 시
  • 봄은 마치

  • 제5화 거울

  • 쌍자음 속에는

     ‘ㄲ’을 보고 있으면 마음 꼬부라진 내 등을 누군가 다가와 두드리는 것 같다. 그가 어깨를 토닥일 때마다 꿈, 깡, 꼴, 꾀, 끈, 끼, 꾼이란 삶의 열쇠가 눈을 뜬다. ‘ㄸ’을 쳐다보고 있으면 활짝 핀 꽃 두 송이가 꿀벌을 부르는 것 같다. 손잡고 높이 오른 두 사람이 멀리 내다보며 기뻐 소리치는 것 같다. 목젖에 햇살이 들이치는 것 같다. ‘ㅃ’을 굽어보고 있으면 꿈 보따리 위에 놓인 밥 두 그릇이 보인다. 네댓 숟갈 서로에게 나눠 주는 활짝 웃는 잇몸이 보인다. 똑같이 줄어드는 빈 그릇이 빛난다. ‘ㅉ’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난봄 꽃대궁과 한여름의 이파리와 늦가을 알찬 열매를 다 바치고 뿌리만 꼭 껴안고 겨울을 나는 희망의 갈무리가 보인다. 믿음의 뿌리가 당차다. 우리는 ‘ㅆ’이 되어 손을 맞잡고 봄으로 간다. 도토리 키 재기처럼 어깨를 친다. 어미 부리를 기다리는 알껍데기가 아니다. 서로 어깨를 칠 때마다 싹이 튼다. 땅속 깊은 데부터 발자국 소리를 채운다.- 이정록, 「쌍자음 속에는」* 자운고등학교 박용숙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목요일 7교시 수업 시간은 1학년 9반이다. 오늘도 9반의 대부분은 일어서 있을 거다. 2교시와 3교시에 든 날은 제법 멀쩡한데, 7교시만 되면 더 시끄럽다. 더구나 7교시는 교과서 진도를 나가는 수업 시간이다. 시작종에 교무실을 출발해 교실로 향한다. 3층 복도의 끝에 있는 9반 교실에 가는 동안 두 개 반을 거친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서 교실로 향해야 할 학생 중 거슬러오는 녀석이 있다. 대개는 재효다. “물 빨리 먹고 가도 돼요?”, “그래, 얼른 와.” 이미 물 마시러 온 녀석에게 “안 돼!” 해 봐야 관계만 나빠진다. 재효는 9반 학생 중에서 가장 분노가 많아 보인다. 노래를 좋아해서 흥얼거리는 태호, 수업 첫날 “수업 안 할 건데요.”하던 경환이, 스프레이 뿌리던 대준이도 있지만, 그 넷 중 행동이 가장 거칠다. 목요일 3교시 9반 수업은 과정 평가로서의 수행 평가 시간이다. 말하기, 글쓰기, 매체 활용 등을 한다. 오늘 3교시는 수업 시간 토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토론자의 자세를 담은 영화를 보았다. 학생들은 영화를 보며 12명의 토론자에 대해 활동지를 적어야 했다. 재효는 어느새 슬그머니 엎드려 잔다. 재효를 두 번을 깨웠고, 세 번째 엎드려 잤을 때 교실 뒤로 나오도록 했다. 일어서면서 의자를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뺀다. 갖고 나와야 하는 책상 위의 물건도 거친 행동으로 집는다. 서 있는 책상에 나와서는 영화가 재미없다고 투덜댄다. 아놔……. 걸을 때 보면 터덜터덜 걷고, 의자에 앉은 몸은 거의 늘 뒤로 45도 이상 젖혀져 있다. 그래도 어느 틈에 활동지는 대충이라도 해 놓아서 가까이 가 보면 다하고 노는 거라고 한다. 거친 표현과 행동 때문에 교무실에 와서 약속 종이도 쓰고 갔다. 특별실 청소도 두 번이나 했다. 원래 한 번이었는데,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아 한 번이 늘었다. 처음에는 얄미웠는데, 그 녀석에게 집중하다 보니 나름 재미있는 점도 발견했다. 활동지는 빠뜨리지 않고 다 채워 놓는다는 점. 내가 벌점을 줄까, 인성지도부에 데려갈까,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얌전해진다는 점이다. ‘그래 그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 학교에 잘 나오잖아…… 활동지는 다 하잖아…… 그래도 금방 반성하잖아……’ 나는 또 7교시 수업에 재효가 어떨까, 하고 수업에 들어갈 거다.

    맞춤 제작 시
  • 모국어를 가장 서정적으로 만든 청년 시인_윤동주(하)

     윤동주는 어려서부터 동시를 썼고 숭실중학교를 다닐 때 교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에 몰두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정지용을 찾아가 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윤동주는 문과에 입학할 때 의과 진학을 고집한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로 보아 그는일찍부터 문학에 관한 간절한 열망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윤동주가 일본으로 가서 계속 영문과에 적을 둔 것도 문학에 관한 그의 지향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원래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무렵 시집을 내려 하다 주위에서 시집 발표 때문에 생길지도 모르는 위협을 우려하여 만류하였고, 후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결국 그 시집은 해방이 된 후에서야 발행되었다. 그것도 동주가 없는 세상에서. 그 시집이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그가 일본에서 릿쿄대학교를 다니다가 도시샤대학교로 편입한 이유 중 하나가 정지용이 그곳을 다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시인의 삶을 꿈꾸었는지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가슴이 저린다. 다만 시를 사랑하였을 뿐인 순결한 청년 윤동주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채 남의 나라 땅에서 숨져야 했다. 우리는 지금 언제 어떻게 발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시를 쓰는 시인의 가슴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시 「병원」은 마치 나라 전체가 병들어 버린 현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시를 어떤 여인에 관한 사랑으로 읽는다 하더라도 그 사랑은 불가능의 단어들로 가득하다. 찾아오는 이도 없고, 나비 한 마리도 없고, 아픈데 병은 없다는 늙은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만 하는 사랑이다. 없는 것이 가득한 사랑이다. 살구나무와 금잔화 꽃 한 송이가 그 고립된 사랑의 위로가 될 수 있었을까. 윤동주의 시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쉽지만 가볍지 않고, 가볍지 않지만 우리를 지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어느 고요하고 낯선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잠시 생각하게 한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다니며 기숙사에서 머문 기간은 3년 정도, 스물두 살 때부터 스물네 살 때까지다. 한 인간의 생애 가운데 가장 빛나는 시간을 이 공간에서 살았다. 그때는 식민지 조선의 운명이 나날이 기울어 가던,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발악하듯 한반도를 옥죄던 시절이었다. 정지용의 경우 1940년대가 되면서 절필하고 글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역사상 가장 많은 파괴와 학살이 있었다는 제2차 세계 대전이벌어지던 시기였다. 윤동주가 희미한 불빛 아래 「서시」를 쓰던 때가 바로 1941년이었다. 시가 설 자리가 없던 시절에 시를 쓴것이다. 윤동주는 만년필로 시를 썼다. 그의 글씨는 그의 눈빛처럼 부드럽고, 원고지의 네모 칸을 벗어난 적이 별로 없는 음절들은 굳게 다문 그의 입술처럼 견결하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겠다는 듯이,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듯이. 기념관 앞에는 「서시」를 육필 그대로 옮긴 시비가 있다. 당시 기숙사였던 건물을 나오면 바로 앞, 윤동주가 거닐던 공간이다. 획 하나하나를 천천히 그어 간 그의 손놀림이 느껴진다. 내가 시비를 바라보며 섰던 자리를 윤동주도 거닐었을 것이다. 윤동주 문학관은 윤동주가 종로구에 살았다는 것을 근거로 종로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쓰여진 시」 등을 이곳에 사는 동안 썼다. 이 문학관은 구조로는 단연 현대적 감각을 보여 주는 곳이다. 내가 그동안 다녀 본 모든 문학관은 건물의 구조가 기본적으로 ‘집’이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상자형태다. 한마디로 집이 아니었다. 본래 상수도 관련 기계 시설이 있던 가압실과 두 개의 물탱크를 개조하여 만든 독특한 이력을 가진 건물이다. 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생애를 설명해 놓은 작은 액자들이 벽에 걸려 있고 중앙에는 용정에서 가져온 우물용 목재를 설치했다. 이곳은 사실 복제본 육필 원고 외에는 윤동주 관련 자료가거의 없다. 자료 대부분은앞서 말한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관에 있다. 그러나 1전시실에 이어진 두 개의 공간(2전시실-열린 우물, 3전시실-닫힌 우물)은 건축가의 뛰어난 감각을 맛보게 한다. 두 개의 물탱크 중하나는 영상실(닫힌 우물)로, 하나는 전시실과 영상실을 잇는 공간(열린 우물)으로 만들었는데 ‘잇는 공간’의 물탱크는 위쪽을 뚫어 하늘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묘한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그것은 어딘가에 갇혀 있는 느낌, 벗어날 수 없는 폐쇄의 공간에 놓인 것 같은 느낌이다. 눈을 들었을 때 사각의 하늘이 뚫려 있다. 윤동주의 생애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간단하게 이것이 윤동주의 시대가 주던 억압과 윤동주가 꿈꾸던 희망의 몽타주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더구나 벽에는 시멘트 물탱크의 내부에 오랫동안 쌓인 얼룩을 그대로 두어 걸어가는 동안 옷깃에 스친다. 영상실 또한 물이 찼던 시멘트벽의 얼룩 위로 영상을 뿌린다. 마치 상처의 배경에 윤동주의 삶을 보여 주면서 시대의 흔적과 관람자를 대면케 하려는 것처럼. 집을 오직 생존과 주거의 공간으로만 인식해 온 나에게 이런 경험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공간 자체를 서정과 서사의 공간으로 만들어 그곳에 들어선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흔드는 것, 그것이 현대 건축의 힘인가 싶다. 이는여행지에서 잠깐 맛볼 수 있는 경험일지도 모르지만 그여운은 오래 남는다. 내가 그동안 다녀 본 몇몇 기념관과문학관 중에서 근래에 문을 연 충청남도 부여의 신동엽 문학관, 제주특별자치도의 추사관 등에서도 바로 이런 낯선 공간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건물 뒤로 오르막이 이어지는 언덕은 서울 북서쪽을 감싸고 있는 인왕산 자락인데 종로구에서는 이곳을 시인의 언덕으로 명명하였다. 윤동주가 걸으며 내려다보았을 서울의 풍광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겨울과 봄이 겹치는 계절의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즐기고 있다. 윤동주도 이런 시간에 여기 있었을까. 그도 햇살 속의 저 풍광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을까.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내가 옥천에 살면서 정지용 문학관에 가까워지게 되고 언젠가 시인들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 첫 번째 손님을윤동주로 삼은 것은 그의 시를 가슴에 품은 뜻도 있었지만, 정지용과 그의 친연성 때문이기도 했다. 정지용이 윤동주 시집의 서문을 썼고 서로 도시샤대학 동문이라는 것, 도시샤대학에 두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는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도시샤대학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두 사람의 시 세계는 다르지만 적어도 두 시인은 암울한 시대를 건너오면서 시인의 이름을 오염시키지는 않았다는 게 어떤 위로가 된다. 그들이 죽고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대의 그늘이 말끔히 지워졌다 하기는 어려우니 어찌 그 이름이 새록하지 않겠는가. 두 시인은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일본의 왕을 찬양하면서 살아남아 오래오래 변명을 일삼던 어떤 시인들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지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에서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와 나눈 이야기를 소개한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샤쓰나 거저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끼지 않읍데다.”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수용된 지 2년 만에, 불과 해방을 6개월 앞두고 죽는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하에서 죽는다. 공식적으로 그는 일본의 신민으로 태어나 만주, 한반도, 일본에서 일본의 신민으로 살다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국어를 가장 서정적으로 만든 시인이었다. 발표할 희망도 없는 시를 쓰며 수행자처럼 묵언하는 청춘을 살다가 죽어 간 시인,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까. 다시 길을 떠나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시인 문학관 기행
  • 제6화 해야 하니까 하는 것뿐

  • 어쩜 우린

     가장 가깝게 가장 멀구나 우린 등을 맞대고 있기에 서로 반대쪽을 보고 있다고 모두 적은 아니지 등으로 전해지는 뜨거움과 꿈틀거림 너도 참 치열하게 사는구나 어쩜 우린 한편일지도 몰라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세상에 맞서 서로의 등 뒤를 막아 주고 있다고- 이장근, 「어쩜 우린」* 일산동고등학교 김미진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올해 1학년 중에 참 힘든 반이 있다. 수업 시간에 핸드폰으로 게임을 한다. 교과 담당 교사가 핸드폰을 교탁 위에 두려고 하면 시계만 봤다 등등 이유를 대며 선생님들과 마찰을 일으킨다. 매시간 큰일을 보러 화장실을 가겠다고 해서 참으라고 하면 그런 것을 어떻게 참느냐며 대든다. 쉬는 시간에 몰래 학교를 나가서 사 온 컵밥을 수업 도중 먹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 사방팔방 돌아다니기도 한다. 점심시간 식당 앞에서 새치기를 예사로 한다. 심지어 며칠 전 수업 시간 중 몇몇 녀석이 수업 시간 중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규칙, 예의에 대해서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아하기도 하고 어쩌다 저리 못 배웠을까 짠하기도 하다. 어제 그 아이들과 함께 동아리를 해 보았다. 나는 교과 담당 교사로서 참관했고 동아리를 많이 해 본 선생님이 진행했다. 선생님은 사소한, 예사로운 일 하나도 넘기지 않고 고마움을 표시한다. “자리에 앉아줘서 고마워요.”, “카드를 나눠 주어서 고마워요.”, “의자를 세 개씩이나 나눠 주어서 고마워요.” 등등……. 한 시간 동안 선생님은 꽤 많은 칭찬을 던진다.  처음에 산만하던 아이들이 차츰 선생님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불안함에 감정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아이들이 학급에 대한 느낌을 나누고 수업에 대한 느낌을 나누며 차츰 집중한다. 심지어 끝날 무렵 아이들에게 카드를 모으는 도움을 구하니 모든 학생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카드를 모은다. 5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모습을 보며 여러 마음이 들었다. 말하다 울어버리는 몇몇 아이들을 보며 ‘너희들이 참 힘들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담임 교사인 양 행동하는 아이를 보며 ‘저 녀석은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쪽 눈이 실명 직전인 아이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학교에서 얼마나 될까.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시간은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들으라고 강요만 하던 게 문제는 아니었을까.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것인지, 일방적으로 들어주기만 하는 공간이 학교는 아닌데, 어떻게 해야 올바른 교육이 가능한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되는 한 시간이었다.

    맞춤 제작 시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순결한 청년_윤동주(상)

      3월 하순 오후. 서울시 종로구의 윤동주 문학관 앞. 연세대학교에 있는 윤동주 기념관을 거쳐 지금 막 도착했다. 창의문로의 외곽 풍경이 가까이 펼쳐진다. 윤동주 문학관 기행을 하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시는 「서시」였다. 국어 교사로 살면서 아이들에게 수없이 가르쳤고 해마다 새롭게 만나는 아이들에게 첫 번째 암송 시로 「서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수업 종이 울리고 교실 문에 들어서면서 나는 “서-시! 윤-동-주!”라고 외치며 잠시 문 앞에 서 있곤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고 암송을 시작했다.  왜 윤동주의 「서시」를 첫 암송 작품으로 제시했을까. 교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이런저런 갈등과 고통이 한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서시」는 우울한 날 혼자 읊조리며 자신을 다독거리기에 좋았으니까. 그러나 꼭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서시」만큼 무결점의 시로 꼽을만한 게 있을까 싶다. 아무튼, 언제부턴가 윤동주의 「서시」는 아이들에게 암송하게 할 첫 시로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외우기 적절한 길이, 쉬운 낱말, 내면을 향한 고요한 성찰과 다짐, 청춘의 우울과 쓸쓸함이 담긴 시어, 어둠이 스쳐 간 시대의 뒷모습, 이런 것들이 이 시의 아프지만 단단한 힘이라고 할 것이다. ‘부끄럼’과 ‘괴로움’과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요즘 세대 아이들에게 그리 썩 달가운 것은 아니었겠지만, 아이들은 병아리처럼 입을 모아 시를 낭송하곤 했다.  윤동주의 생애를 간단히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게 좋을 듯하다. 윤동주는 만주 용정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여 개척과 교육에 헌신한 분이었고 아버지는 교원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가정이었다. 용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평양에서 중학 과정을 다녔다. 연희전문학교와 일본 도시샤 대학 시절 시를 썼으나 살아서 시집을 발간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사상범이라는 죄목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중 해방을 몇 개월 앞두고 사망한다. 유고 시집은 벗 송병욱의 고향 집(전라남도 광양시) 마루 밑에 숨겨져 있다가 해방 후 빛을 보게 된다. 한국 문학은 그를 ‘순결한 청년 시인’으로 기록하곤 한다. 저항 시인으로 일컬어지곤 하지만 그의 시는 저항을 외부로 향하기보다 처절한 자기 성찰의 언어로 채움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눈을 감고 내면을 응시하게 한다. 그는 숭실학교 시절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자퇴했지만 이육사처럼 의열단원도 아니었으며 독립운동에 실천적으로 참여한 행동가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 진솔했던 시인이었다. 순결한 시인이고자 했다. 술도 마시지 않던, 연애의 흔적조차 없는, 수도자 같은 심성으로 살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 시인이다. 그것은 청교도적인 집안 분위기와 결합한 휴머니즘이라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그가 남긴 시가 일제에 맞서 폭약을 들고 ‘돌격 앞으로!’를 외친 무장 투쟁의 시보다 더 오래, 더 널리 살아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독립을 바라지 않았던 것은 분명 아닐 텐데 이런 노래(또는 시)는 광범위한 사랑을 받기 어려운 모양이다.  중국의 용정, 일본의 도시샤 대학 등 윤동주를 기리는 장소는 여러 곳이 있지만 내가 찾은 곳은 여기 문학관과 윤동주 기념관이다. 충청북도 증평군의 21세기 문학관에 입주해 있는 동안 소설가 김영옥, 윤순례와 함께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도 다녀왔지만 「서시」를 새겨 놓은 시비 하나를 보았을 뿐 글로 쓸 만한 건 없다. 윤동주와 원주시가 인연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연세대학교와 윤동주의 이름을 연결 지어 거기 「서시」를 새겨 놓았을 뿐이다. 다만 내가 본 대학 캠퍼스 중에서 가장 안온한 분위기의 풍경이라는 인상이 남는다. 치악산 자락의 한 줄기, 박경리 토지 문화관이 멀지 않은 곳에 마치 엄마의 품처럼 넉넉하고 푸근한 지세에 자리 잡은 대학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학교 입구의 호수도 일품이어서 벚꽃이 필 무렵 간다면 한나절 산책이 풍요로울 것 같다. 시비는 정문에서 왼편 위의 산 언덕 소나무 숲 사이에 고적하게 세워져 있었다.  윤동주 문학관은 2012년 서울시 종로구에서 지은 것이고 기념관은 윤동주가 머물던 기숙사 건물의 2층에 마련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내에 있다. 두 관의 거리가 가까워서 함께 둘러보기 좋다. 버스를 이용하면 30분 정도, 승용차로는 20분이면 된다.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정보와 감상의 목록이 되던 시대는 가 버렸다. 스마트폰을 들고 문학관을 찾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스마트폰을 켜고 검색하면 원하는 정보를 모두 제공한다. 유비쿼터스의 시대! 언제 어디서나 수많은 정보에 접속할 수 있다. 승용차를 타고 가면 거리와 소요 시간이 제시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어떤 경로들이 있는지 열차, 버스, 지하철 등 이용 대상에 따른 정보가 제시되고, 어디로 가는 버스가 몇 분 후에 내가 서 있는 정류소에 도착하는지를 알려 준다. 이것이 기행의 맛을 감소시킨 것인지 증가시킨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정말 지식을 얻기 위해 어딘가를 찾아다니는 모습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리 많은 정보가 손안에 있다 하더라도 어느 장소에 가고 오는 과정의 느낌, 도착지에서의 감흥과 상념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로드뷰를 통해서 이미 대부분 거리와 풍경을 앉아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실제 어떤 작가들의 경우 세계의 어느 도시를 가본 것처럼 쓸 수 있다고도 하지만 정보는 산과 들과 거리가 주는 풍경의 냄새와 바람을 내 몸에 닿게 하지는 못한다. 어쨌든 첫 번째 문학관 기행은 첨단의 기계가 주는 편리함에 감탄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기차와 버스를 이용하면서 계속 스마트폰에 물어보았고 그것은 답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내 사용법이 서툴렀을 뿐이다.  윤동주에 관한 정보 또한 마찬가지다. 인터넷에 수백 권의 윤동주 논문이 올라와 있으니 윤동주를 공부하고 싶으면 노트북을 켜면 된다. 그러나 기행은 몸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은 몸의 욕구에 응답한다는 것이다. 윤동주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구하기 위해 어디론가 갈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것이 문학관에 가서 맛볼 수 있는 느낌을 대신해 주지는 못하기에 우리는 돌아다니는 것이다. 머지않아 청각과 후각을 포함한 오감을 모두 구현해주는 컴퓨터 시스템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있긴 하지만 지금 나는 내 몸을 이끌고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윤동주가 살던 곳으로! 윤동주가 거닐던 곳으로!  윤동주 기념관은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머물던 기숙사였다. 1922년 핀슨홀로 명명된 기숙사 건물을 2013년에 윤동주 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현재는 건물 대부분을 대학 법인 사무실로 쓰고 있고 2층에 윤동주 기념실을 마련하였다. 연세대학교에는 지금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들이 그대로 있다. 팔뚝 굵기의 담쟁이덩굴로 덮인 건물들이, 한반도에 들어온 초기 서양 건축 양식들을 짐작하게 한다. 기념실은 작고 깔끔했다. 모자에 주름살 하나 지는 것조차 불편해했다는 윤동주의 성격이 그러했을까? 좁은 공간에 윤동주와 관련된 자료들을 촘촘히 배치하여 그의 시와 삶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했다. 공간을 변형시키지 않고 직사각형의 실내 가운데에 유리관을 설치하고 유품과 자료들을 가공 없이 배치했다.  육필 원고, 사진, 주변 사람들의 증언, 살아서는 출판된 적이 없었던 시집, 고향 집의 기와 등등. 홀로 기념실을 둘러보는 시간은 호젓했다. 1시간 정도 둘러보는 동안 나 이외에 한 사람만 더 들렀을 뿐이다. 그렇게 한적하고 고요한 기념실이라니……. 윤동주가 들여다보았던 내면의 풍경이 그렇게 한가하고 고요했을까. 사진에서 읽히는 윤동주의 표정은 대개 쓸쓸하고 단호해 보였다.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무엇인가를 다독이는 것 같기도 했다. 웃음을 지으려다 만 듯한 표정,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막고 있는 듯 굳게 다문 입술, 고개가 약간 기울어진 사진들이 그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 시대 어느 시인의 표정에서 이런 분위기를 찾아낼 수 있을까. 기형도가 남긴 시편과 그의 표정이 그러했던가. 얼핏 두 사람의 이미지가 겹친다. 젊은 죽음, 시대의 불우, 살아서는 내지 못한 시집, 그리고 그들은 둘 다 서른 해를 살기 전에 죽었다. 윤동주는 스물아홉에, 기형도는 스물여덟에.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연세대 동문이다. 윤동주가 넉넉한 집안이었고 기형도가 유년 시절 궁핍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기념실에서 읽은 시 「병원」은 그의 쓸쓸한 표정과 겹쳐지며 더 아릿하게 가슴에 젖어 왔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시인 문학관 기행
  • 제7화 시 쓰기는 어렵다

  • 사랑나무

     길을 가다 작은 나무를 만났습니다 어쩌자고 풀도 아니면서 보도블록 틈에 그것도 사람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길에 어린나무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나무는 좁은 곳도 아랑곳없이 뿌리 내리는 소임을 다합니다 나는 돌멩이를 주워 와 지나는 발길에 차이지 않게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좁은 곳을 택했지만 뿌리가 튼튼해지면 옮겨져 무성하게 자랄 느티나무입니다’ 이름표도 달아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돌멩이 울타리를 보고 이름표를 보고 작은 나무가 다칠세라 살얼음을 딛듯 사뿐사뿐 조심조심 건넙니다 잘 자라라는 덕담까지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나무 하나가 자라려면 얼마나 많은 순간이, 손길들이 지켜주고 응원해 줘야 하는지를 우리 또한 수많은 순간, 지켜준 손길들로 인해 그곳에 있었고 또 이곳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작은 나무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보도블록 틈새 나무든 정원에 심어진 나무든 우람한 나무로 서게 될 날을 그리며 지켜보는 사람입니다 느리지만 끝까지 다독이며 같은 길을 갈 친구입니다 아이라는 꿈나무, 사랑이라는 나무, 우정이라는 나무, 삶이라는 나무 우리는 나무를 가꾸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사랑나무에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것을 압니다 그늘이 되고 품이 되고 손길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보듬을 것입니다 사랑나무 앞길을 노래로 축복합니다 인연이라는 뿌리에 스민 손길들을 축복합니다 두 손 모아 축복합니다 오늘을 축복합니다!- 김미희, 「사랑나무」* 첨단고등학교 조미형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저는 결혼 전 2006년~2010년까지 첨단고에 근무하다가 최근 2017년에 다시 첨단고에 근무합니다. (광주는 교사가 순환해서 근무해야 함.)   2007년 1월에 결혼을 한 저는 당시 1학년 11반 담임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반 아이들 40명 모두가 교복을 입고 와서 깜찍한 결혼 축가를 해 주었지요.  그때 노래를 불렀던 우리 반 아이 중 한 명,  그 아이는 다시 고3 때 반장과 담임으로 인연을 맺었지요. 그 학생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이제 12월에 결혼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 아이의 결혼식을 의미 있게 해 주기 위해 생각한 것이 있어요. 이제는 반대로  저와 저희 남편이 축가를 준비해 주기로 했습니다. (저희 남편은 시립합창단원 바리톤입니다.)  제자의 결혼식 날 풋풋했던 신부의 모습 영상과 저의 감동 멘트를 하기로 했어요. 그때 작가님이 지어주신 시를 낭송하고 싶어요. 긴 글보단 함축적이고 의미 있는 시 한 편이 더 감동일 듯합니다. 참고로 이번에 결혼하는 그 제자는 저처럼 학생과 함께 장난도 치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교사를 꿈꿔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 내내 노력도 열심히 하고 늘 제 옆에서 사소한 심부름도 해 주고, 성적 고민, 친구 고민 등 속마음 이야기까지 함께 나누었어요.  3학년이 되어 반장을 할 때는 정말 많은 도움을 주면서 반을 이끄는 데 힘이 되었고요.  지금은 학생들과 잘 소통하고 열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답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도 연락 잘하고 지내서 그 결혼식 때는 그 당시 고등학교 제자들도 많이 온다고 하네요.  서로 함께 늙어가는 스승과 제자 사이. (사실 학교에 신규 교사들 나이도 이 친구들보다 어린 데 함께 어울리며 늙어가죠.)  같은 길을 선택한 스승과 제자.  그리고 우정, 의리에 관한 내용이면 좋겠습니다.

    맞춤 제작 시
  • 제8화 괜히 좋아할 뻔했잖아

  • 남매들

  • 바다 저 너머

     없었어도 좋았을 바다가 나에겐 있지 파도가 높은 그 바다는 바람이 거센 그 바다는 외할머니와 나를 나와 엄마와 아빠를 나눠놓는 그 바다는 눈물로 가득 차 있었어 때로 눈물이 피보다 더 진하다는 것 알아 바다가 아니었으면 우린 눈물을 몰랐을 거야 그런데 그 눈물의 바다가 우리를 나눠 놓는 줄 알았는데 그리움으로 안타까움으로 출렁이는 바다 때문에 우린 더욱더 하나가 돼 바다 멀리 있으면 사랑도 먼 줄 알았는데 사랑의 영토는 바다만큼 넓어져 바닷가 바위처럼 우뚝하고 거센 파도를 견딜 만큼 단단해져 그 힘으로 난 싸구려 제빵 기구에 꿈을 구웠지 없었어도 좋았을 바다 덕분에 내 꿈에 날개를 달고 파도를 넘어 거센 바람을 뚫고 그곳이 일본이든 한반도 어느 곳이든 날아갈 거야- 복효근, 「바다 저 너머」* 정광고등학교 정주옥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나는 12살이 되기 전까지 아빠와 떨어져 살았다. 그런다고 해서 부모님께서 이혼하신 건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일본 사람이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한국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화를 내시는 외할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한국으로 온 뒤, 아빠와 결혼하셨다. 엄마는 한국어를 독학하셨다. 그만큼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남성과 결혼을 한 뒤 외할머니께 자랑스러운 남편을 자랑하고 싶어 아빠를 데리고 일본에 가기로 했다.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그냥 한국에서 평생 살고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지만 약간의 기대를 하신 듯했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외할머니를 찾아갔다. 엄마는 외할머니께서 아빠를 싫어하시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외할머니는 오히려 아빠를 반겨 주셨다. 그 당시 아빠는 엄마와 결혼한 뒤 일본어 공부를 막 시작해서 일본어가 서투르셨다. 외할머니는 아빠의 그런 모습이 귀엽다며 아빠에게 많은 대접을 해 주셨다. 그렇게 엄마, 아빠는 일본에서 지내다가 오빠가 태어났다. 그리고 2년 후 엄마와 아빠는 외할머니와 오빠를 데리고 아빠의 여동생들이 있는 광주로 갔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엄마는 나를 낳으실 때 내 머리가 아래로 향해 있지 않고 위로 향해 있어 제왕절개를 하였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심한 목감기에 걸려있으셔서 제왕절개를 하신 뒤 기침을 하실 때마다 배에 힘이 들어가 상처가 벌어져서 고생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1년 뒤 나와 오빠와 엄마만 일본에 다시 돌아가고, 아빠는 일본에서 일을 못 하시기 때문에 한국에 남으셨다.  오빠와 나에게는 조부모가 외할머니 밖에 안 계셔서 엄마의 엄마가 계시는 일본으로 간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외할머니 집에서 200m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서 살게 되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정말 힘이 넘치며 밝은 성격이어서 자주 날뛰었다고 한다. 나는 외할머니 집에 매일 같이 놀러 가 외할머니 집에서 날뛰고 어지럽히다가 치우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말썽꾸러기였다. 초반에 외할머니는 귀여운 손녀가 하는 일은 모든 게 귀엽다며 좋아하셨지만 매일 같이 날뛰는 나에게 지쳐 멀리 이사 가라고 버럭 화를 내셨다. 우리는 할머니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1시간 또 버스 타고 1시간 걸리는 먼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오빠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엄마 혼자 돈을 벌다 보니 가정형편이 어려워 오빠에게 용돈을 많이 못 주고 우리에게 과자를 자주 사 주지 못하셨다. 오빠는 과자를 아껴서 나에게 주곤 했다. 우리 집과 달리 외할머니의 집은 2층 주택에 정말 넓어 집에 복도도 있고 여름방학이면 외할머니집의 옥상에서 바비큐를 하거나 불꽃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주 아팠던 나는 일하는 엄마 대신 외할머니 집에 맡겨져 휴양을 하게 되었고 한동안 외할머니 집에서 지냈다가 다시 집으로 가곤 했다. 아빠는 4년, 6년에 한 번씩 일본에 와 주셨다. 아빠가 오신 첫날에는 내 아빠지만 어색하고 불편하여 내키지 않았지만, 하루가 지나면 금방 친해져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아빠가 일본에 있을 수 있는 기간은 고작 1주일 밖에 없어 즐거운 시간도 금방 지나가 버리고 아빠와 공항까지 가고 헤어지기 직전에 나는 눈물이 나 공항 한가운데서 오열했다. 아빠와 엄마, 오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마음을 꾹 참고 웃는 얼굴로 헤어지려 했지만, 매번 내가 우는 탓에 눈물이 나 버렸다고 한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일본에 놀러 오셨을 때 외할머니와 엄마와 아빠가 진지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그리고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몇 달 뒤 우리는 한국에서 살게 되었다. 한국으로의 이민이 급하게 정해진 일이어서 일본 친구들과 이별 파티를 하고 외할머니는 최대한 우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리가 한국으로 갈 때까지 우리 집에서 보내셨다. 나는 한국으로 이사를 하기 싫었지만, 오빠는 좋다며 방방 뛰어다녔다. 그리고 2010년 4월 2일에 오빠와 나는 한국으로 갔다.  엄마는 조금 더 정리할 것이 있다며 6월에 간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엄마가 다시 한국으로 가버린다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셨다. 할머니는 엄마의 손을 꽉 잡고 가지 말라며 우셨지만, 엄마는 할머니를 일본에 두고 가셔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 네 가족은 한국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다문화학교였다. 우리가 일본에서 다니던 학교는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학교였지만 한국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이거 얼마에요.’말고 다른 단어들은 아예 몰랐다. 그러다 보니 5학년 때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않고 오직 한국어만 달달 외우는 식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6학년 때 일반 학교에 갔지만, 공부에 잘 따라가지 못해 고생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많은 친구를 사귀고 잘 지냈지만 1학년 겨울에 친했던 친구들이 갑자기 내가 싫다며 학교 폭력을 가했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지만, 나한테도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며 조금 더 있으면 다시 화해하고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며 위로를 해 주셨지만 화해하기는커녕 그 무리는 학교가 끝난 방과 후에 나를 따로 부르고 욕을 하고 SNS에 ‘한국에 왜 왔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라.’라는 글을 올리고 단체 대화방에 나를 초대하여 심한 욕설을 퍼붓고 부모님의 욕까지 했다.  나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우울해져 집에서도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나를 본 오빠는 부모님께 내가 이상하다고 말을 하고 내가 학교 폭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들은 신고하라며 화를 냈지만, 나에게는 아직 한 명이지만 나를 받아 주는 친구가 있어 2학년 때까지 참기로 했다. 그 친구가 지금의 절친이다.  그렇게 죽고 싶을 정도의 힘든 시간이 지나고 2학년에 올라갈 때쯤 그 무리는 하나둘 흩어져갔다. 그리고 2학년, 3학년 때는 아무 문제 없이 다른 친구들과 즐거운 학교생활을 만끽했다. 정말 어릴 때부터 제과제빵사가 꿈이었던 나는 제과제빵 학과가 있는 특성화고에 가려 했지만, 성적이 안 돼서 그냥 인문계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3학년 여름방학 때 거의 4년 만에 일본으로 갔다. 외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뵈려고 갔었다. 오랜만에 뵌 외할머니는 우리를 정말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병도 많이 나아지셨다. 며칠 동안 일본에 있던 친구들도 만나고 너무나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대학 진학을 해야 하는 고3이 되었는데 성적은 오르지 않고 넉넉하지 않은 가정 환경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손재주가 있었던 나는 제과제빵을 하는 직업반으로 빠지려고 했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공장에 가서 한쪽에 싸구려 오븐 기구를 장만하여 혼자 제과제빵 하는 연습을 하곤 했다. 직업반으로 가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2학년 때 일본어를 가르치는 담임 선생님과 상담 끝에 대학에 가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지금은 보충도 듣고 야자도 하고 심지어 토요일에 나와서 자율 학습도 한다. 내 인생 처음으로 공부를 해본다. 비록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과 내 꿈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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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화 날씨 좋네요

  • 숨바꼭질

  • 날라리 벌

     치마폭에서 놀지 않을래요. 치마폭은 엄마 그림자 안에만 갇혀 있죠. 세탁기 통에서 청바지 지퍼에 끼어 투덜거리거나, 고린내 나는 양말과 속옷 사이에서 이런 운명이 지긋지긋하다며 자맥질할 뿐이죠. 아버지 러닝셔츠나 작업복은 빨랫줄에서부터 기가 죽어 있죠. 그렇게 살다가는 엄마 아빠 꼴 난다는 말, 귀 뚫린 뒤 진저리 치게 들었죠. 내가 왜 불화살 맞은 멧돼지처럼 나도는지 모르죠? 나는 아빠 땀 냄새가 자랑스러웠어요. 엄마가 싸준 김밥과 손뜨개질 한 목도리가 좋았어요. 정말 병아리처럼 엄마 치마폭에서만 살고 싶었죠. 아빠 팔에 매달려 세상 흙탕물을 건너고 싶었어요. 나를 내친 건 엄마 아빠의 불안이에요. 이미 꿈을 팽개친 어른이란 걸 들킨 뒤였죠. 못나서 미안하다고 성질부터 부렸잖아요. 나는 날라리가 아니에요, 날라리 벌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떠돌아다니는 거 아니라고요. 친구들보다 멀리 날아가서 색다른 꽃을 만나고 오죠. 모두 내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질하지만 내가 노니는 드넓은 나라의 꽃과 꿀은 알지 못하죠. 내가 입고 다니는 이상한 옷은 색다른 꽃가루죠. 으스대는 게 아니라 어깨춤을 추는 거예요. 기다려 보세요. 가까운 꽃이 다 져버리면 산 넘고 바다 건너 새 세상으로 안내할게요. 그때는 당당하게 푸른 작업복을 입고 둘러앉아 김밥을 싸요. 나는 날라리가 아니에요. 꿀통에 호기심과 용기가 넘치는 날라리 벌이에요. 꿀만 아니라 돌아오는 길까지 나눌 거예요.- 이정록, 「날라리 벌」* 가좌고등학교 이선영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개학을 하고 이틀이 지나도록 한 놈이 등교하지 않았다. 작년 담임 선생님께 받아 놓은 어머니의 연락처로 전화를 해 보았다. 내일은 꼭 보내겠다는 어머니의 한숨 섞인 다짐과 함께 결석 64일의 생활기록부를 보며 올해는 정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작년 담임 선생님께서도 그 아이의 집까지 찾아가서 새로 만난 담임 선생님과 잘 지내야한다고 단단히 일러두신 듯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들이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학교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고 훈수를 둔다. 그러나 정말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모습이 모두 다르듯이 말이다. 이럴 때 나는 대개 그냥 마음을 접는데, 이 아이는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이 새끼가 어디까지 가나 한번 건드려보고 싶었다. 외할머니 댁에서 먹고 자고 하는 이놈을 찾아갔다. 대개 사춘기 아이들은 너무 많은 관심은 피하려고 하고 또 내버려두면 어른들이 관심이 없다며 시비를 건다.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항상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게 아이들이다. 그런데 같은 교무실의 선배 선생님께서, 나는 예전에 애들이 안 오면 집에 찾아가서 직접 데리고 왔었어. 집에 한두 번 가기 시작하면 부모도, 아이도 달라지더라고. 정말일까? 외할머니의 아침 운동과 더불어 나도 매일 그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등교하기 시작했다. 현관 비밀번호까지 틀 정도가 되었고. 매일 불같이 쳐들어가서 너 같은 새끼는 이불을 덮고 잘 자격도 없다며 이불을 빼버리기도 했다. 어떤 날은 순순히 따라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도망을 쳐버리기도 했다. 고통의 나날은 쌓여만 갔다. 수능은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수능이 끝날 때까지 담배 한 번을 안 피우고 시험을 보았다. 이게 그동안 고생한 담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나. 물론 결과는 엉망이었다. ...결국 대학을 보냈다. 세상에나 운도 좋은 새끼. 지방대학이긴 하지만 그동안 알바로 갈고 닦은 사장님을 홀리는 솜씨로 면접을 보고 대학에 척하니 합격을 하였고,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던 그 비인기학과는 경찰행정학과로 편입되었다. 운 좋은 새끼. 경찰서에 그렇게 들락거리더니 경찰행정학과래. 1월 1일.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대학 안 다닐래요. 너는 정초부터 선생님한테 전화를 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라고 말해도 시원찮을 판에 보내놓은 대학을 안 다닌다고? 미쳤구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야? 전화기 너머로 우는 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저 20분에 한 번씩 그냥 화가 나요. 병이구나. 내 새끼가 병이었구나. 그냥 반항기에 하는 소리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래, 아들아. 선생님이 미안해. 화가 나는데 참고 전화를 해줘서 고맙구나. 얘기할 데가 없어요. 엄마가 걱정하실까봐 말을 못 하겠어요. 그래. 나한테는 괜찮아.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니까 난 걱정 안 해. 잠이 안 오고 불안해서 술을 먹고 동이 트면 잠이 들고, 내가 아침부터 들이닥쳐서 등짝을 때려가며 깨워서 죄인처럼 등교했던 시간들이. 서로에게 스쳐갔다. 교사는 부모여야 하고, 때로는 친구여야 하고, 또 철저하게 제3자로서 기능해야 한다. 3년이 지났다. 졸업을 하고도 몇 차례 연락이 와서 고민을 털어놓고 나도 걱정이 되곤 했지만. 이제는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세상에 잘 적응을 하는 것 같다. 다행이고 기쁘다. 17년 전의 나는 아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인생에 귀감이 되는, 평생 아이들의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조금 달라졌다. 졸업한 아이들한테 연락이 자꾸 오면 불안하다. 나는 스쳐가는 교사이고 싶다. 아이들에게 평생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 부담스럽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꾸려가는데 자꾸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나의 미운오리새끼들이 하나 둘 나의 품을 떠나는 즐거움과 보람으로 쿨 하게 살고 싶다. 나는 아이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지는 교사가 아니다. 나는 그냥 내 삶이 행복한 인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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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화 오늘의 시는

  • 그리운 친구

  • 나무와 늘보

     하루 한 번은 나무 위에서 수업해요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마음에 드는 가지에 앉아 나뭇잎을 읽어요 또박또박 햇살이 쓴 이야기를요 눈감고 바람의 속삭임을 듣는 것도 재미있을 거예요 조잘조잘 먼 곳에서 담아온 이야기를요 이도 저도 싫으면 하품 길게 하고 낮잠을 자요 달달한 꿈으로 피로를 녹여요 하루 한 번은 시계를 보지 않아도 되는 수업을 해요 나무의 시간에 맞춰 천천히가 되어요 빨리 하느라 놓쳐버린 것들과 멀게만 느껴지는 나를 찾는 수업을 해요- 이장근, 「나무와 늘보」* 대구동부고등학교 민호기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여유로움’을 배우다 - 북카페를 가다                                                                                                                                                   동부기자단 동아리 반장 김세윤 4월 초. 봄비가 내린다.  서먹서먹하던 3월을 보내고 처음으로 동아리 반일제를 나가는 날이다. 첫 동아리 반일제 활동이 의미 있고 기대가 됐던 이유는, 교지부에 처음 들어와 3월 내내 했던 계획 세우기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동부 기자단’이라는 동아리 명에 걸맞게 직접 현장에 나가 직접 사진도 찍고 내용도 조사하기로 한 것. 정확하게는 대구 근대화 골목을 다니며 조별로 맡은 주제를 취재하는 것이고.  하지만 지난주까지 무덥기까지 하던 기온(26도)이 아침부터 급강하했다.(5도) 빗줄기는 굵어지고 시작했고 바람마저 심하게 부는 상황. 이런 배려 없는 봄비 탓에 주로 야외를 다녀야하는 근대 골목 취재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비가 와서 운치 있는 근대 골목을 찍어도 예쁠 것 같기도 했지만, 날씨를 탓하는 친구들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벌써 들려오고 있었다.  문제를 들고 동아리 담당 선생님께 찾아갔다. 회의 결과, 근대 골목 취재는 시원한 가을로 미루고 2.28민주화운동기념회관(2.28도서관)에 갈 것인지, 아니면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구 혁신도시에 있는 북카페에 갈 것인지를 투표를 통해 정하기로 했다. 투표 결과 다행히 모든 친구들이 돈을 가지고 있거나 돈을 빌릴 수 있어서 근처 북카페로 결정. 하지만 슬프게도 검색해낸 북카페까지는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다. 걸어서 15~20분 거리. 어쩔 수 없이 짓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도보를 선택했다.  비도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부는 날씨에 심지어 우산이 없는 친구도 있어 함께 써야만 했다. 옷조차 얇게 입은 24명의 여학생들이 몇 개의 우산에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앞에서 선생님이 인솔해주시고 친구들이 줄을 서서 걸어가는 모습이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는 모습과 비슷해서 한편으로는 기분이 들뜨고 그랬다. 다들 그래서였나, 심한 바람에 친구의 우산이 뒤집어져도 험악한 날씨와는 반대로 모두들 깔깔 웃었다. 그렇게 비를 맞고 웃으면서 북카페(만화카페)에 도착을 했다.  사실 북카페가 처음이다. 기대 이상으로 시설이 깔끔하고 편리했다. 사다리 계단을 통해 올라간 복층 공간에서 단칸방 소파, 테이블 좌석까지 취향대로 골라서 눕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학습 만화 · 애니 · 순정 만화 · 웹툰 등 종류별로 다양한 독서 취향에 맞게 준비되어 있었다. 오로지 공부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바쁘고 버거운 일상을 보내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3시간. 그 여유로움과 한껏 어울리는 곳이었다. 가자마자 신발을 벗고 책장을 스캔하며 복층 다락방에 가방과 짐을 풀고 3시간 권을 결제를 했다. 그리고는 웹툰이 있는 책장으로 가서 그동안 보고 싶었던 웹툰을 여러 권 뽑아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옆에 책을 쌓아 놓고 가장 편한 자세로 책을 보는데 1시간이 그렇게 느긋하게 간 적은 오랜만이었던 거 같다. 선생님께서도 “아 얼마만의 여유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여기로 들어 온 순간 시계 바늘에 돌이라도 달아 놓은 듯 2배로 느리게 흘렀다.  한 30분 정도 책을 읽었는지 목이 점점 마르기 시작하여 3시간 권에 포함되어 있던 아이스티와 과자를 하나 더 주문을 해서 다시 자리에 누웠다. 주문한 아이스티가 나왔는데 빨대 모양도 핑크색 하트인 게 예뻐서 친구랑 사진도 찍고 그렇게 놀았다. 한참 읽고 먹고 떠드느라 지쳤는지 잠이 솔솔 와서 잠깐 눈을 붙였다. 그렇게 놀고 자고 먹고 읽고 떠들었는데도 3시간이 그렇게나 천천히 가다니. 시험이 끝난 날 북카페에 와서 하루 종일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가던 3시간이 지나고 동아리 시간을 꽉 채워서 마쳤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비록 비가 와서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한 하루였지만 바쁜 생활에서 잠깐의 여유를 찾게 해 준 2018 첫 동아리 반일제 활동은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활동으로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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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화 우주인

  • 1화

    시, 웹툰
  • 하품을 하다가

  • 우리들 꽃말

     한 잎 한 잎 바이러스가 날린다 옮는다 퍼진다 머리에 눈에 마음에 손에 손에 카메라에 ‘절세미인’ 꽃말을 가진 벚꽃 바이러스에 감염돼서는 벚꽃보다 내가 더 예쁘다고 우리가 꽃이라고 곳곳에 꽃무리 치유불가다 ‘나’의 꽃말은 ‘행복한 아이’ ‘우리들’ 꽃말은 ‘오늘을 영원히!’ 내년 바이러스가 피는 그날까지 앓기를, 뜨거운 열꽃이 피기를- 김미희, 「우리들 꽃말」* 해운대여자고등학교 이영주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저희 학교는 꽃이 피는 봄이 되면 항상 벚꽃이 멋들어지게 피는 곳입니다. 짧은 등굣길이지만 교문에서부터 운동장까지 가파른 오르막 옆으로 벚나무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이 때즘 여고생의 감성을 가진 아이들이 항상 쉬는 시간에 뛰어나와 끼리끼리 사진을 찍습니다. 벚꽃을 주워다 책갈피를 만들기도 하고 머리에 꽂으며 행복해 하기도 교사에게 나눠주기도 합니다. 특정한 아이들 몇 명만이 아니라 전교생이 그러죠. 어느 해부턴가 담임 선생님과 함께 사진을 찍는 반이 생겨나면서 불문율처럼 꼭 사진을 함께 찍어야 합니다. 급기야 올해는 ‘꽃보다고운’이라고 정해서 아예 반별로 꽃을 테마로 사진을 찍고 전시도 하고 멋진 사진을 찍은 반은 피자를 쏘는 이벤트도 했어요. 1-2시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봄을 만끽하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더군요. 힘든 고등학교 시절에 예쁜 추억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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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화 강철로 된 무지개

  • 2화

    시, 웹툰
  • 비 오는 날

  • 맞춤 제작 시는...

     맞춤 제작 시는 마치 맞춤옷처럼 선생님의 마음에 ‘꼭 맞춘 듯한’ 시를 선물해 드리는 메뉴입니다. 창비 출판사를 통해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들이 매월 선정된 사연을 바탕으로 시를 창작한 후 사연과 함께 게재합니다. 시는 나눌 때 더 감동이 커지는 것처럼, 사연을 올리신 선생님은 물론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했던 다른 선생님들께도 큰 위로와 즐거움으로 다가가길 바랍니다. 맞춤 제작 시 신청 게시판을 통해 학교에서 겪은 선생님들의 다양하고 재미난 사연을 자유롭게 올려 주세요. 오늘도 한 편의 시처럼 살아가는 모든 선생님들을 시요일스쿨이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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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화 성우라고요

  • 3화

    시, 웹툰
  • 제14화 고양이와 귀뚜라미

  • 4화

    시, 웹툰
  • 제15화 내가 사랑하는 사람

  • 5화

    시, 웹툰
  • 제16화 멀리 있는 별들

  • 6화

    시, 웹툰
  • 7화

    시, 웹툰
  • 8화

    시, 웹툰
  • 9화

    시, 웹툰
  • 10화

    시, 웹툰
  • 11화

    시, 웹툰
  • 12화

    시, 웹툰
  • 13화

    시, 웹툰
  • 14화

    시, 웹툰
  • 15화

    시, 웹툰
  • 16화

    시, 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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