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옥수수 뿌리 같이
수염이 덥수룩한 할아버지가
혹시, 그쪽도 돼지를 기르시나? 묻는다.
제사상 돼지머리처럼
빙긋이 수염자리만 긁고 있었더니,
돼지는 수염만 봐도
식구인 줄 안다고 따라 웃는다.
눈인사만 건네려다가
멧돼지 같은 놈들과 살 비비며 사는
고등학교 선생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박철주가 손자 돼지라며 덥석 손을 잡는다.
방학 때 아니라도
돼지털 시대니까 수염을 기르란다.
공부는 어찌 가르치는지 모르지만
수염자리 하나는 멋지다며
연거푸 막걸리를 따른다.
늙은 씨돼지 두 마리가
오래도록 삼겹살집에 앉아
새끼돼지 자랑에 꿀꿀거린다.
- 이정록, 「꿀꿀」
* 천상고 손규상 선생님의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교사와 학부모
어제는 딸 연우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준비한 ‘아빠와 함께 떠나는 북 캠핑’에 다녀왔다. 아이가 미리 가지고 온 가정통신문에는 편한 옷차림 말고는 어떤 준비도 필요하지 않으며 특별한 저녁 식사가 마련되어 있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유치원이 집과 가까운 거리라 아이의 손을 잡고 동네 사이를 한가롭게 걸어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선생님들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고 자리를 안내했다. 정원 한 켠에서는 선생님들이 땀을 흘리며 고기를 굽고 있었고 또 다른 선생님들이 구워진 고기를 자리로 날랐다. 특별한 저녁 식사라고 하기에 아이와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예쁜 도시락 정도를 생각했던 나는 선생님들의 감정 노동에 다소 불편했다.
여기에 겹쳐지는 비슷한 풍경이 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매년 5월 교내 체육행사를 바비큐 파티로 마무리한다. 거기에 붙는 제목도 근사하게 ‘사제동행 바비큐 파티’이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고기를 구워 먹으며 서로를 도닥이는 자리이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학부모님들이 함께 자리하기 시작했다. 학부모님들이 고기를 굽고 교사와 학생들은 그 고기를 받아 먹는다. 내가 고기 굽는 자리를 차지하려 해봐도 학부모님들은 완강하다.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교사로서 학부모님과 삶을 나누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 나도 학부모님을 만나다 보면, 동네 형님으로 만나서 사는 이야기 나누면서 맥주 한 잔 나누고 싶은 학부모님이 분명 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내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 대한 조언을 받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다.
李楨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의자』 『정말』 『어머니학교』 『아버지학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동심언어사전』 등과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 『저 많이 컸죠』 『지구의 맛』, 청소년시집 『까짓것』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산문집 『시인의 서랍』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박재삼문학상, 한성기문학상 등을 받았다.
전체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