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를 만난 지 25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그의 생가에 오니 그곳엔 농사꾼 시골집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뒷산을 업고 지어진 안채와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로 개조된 길가 쪽의 문간 집. 이 생가는 말하자면 전국 시인들의 생가 중에는 가장 젊을 것이다. 김남주가 태어난 것이 운명처럼 해방되던 해 1945년이니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일흔둘이다. 요즘에는 그 나이가 웬만한 경로당에서 청년 취급을 받고 있다는데, 그가 살아 있다면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안채 현판에 신영복의 휘호로 ‘민족 시인 김남주 생가’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서각 작품이 있다(‘고정희 시인 생가’는 신영복의 서체이긴 하지만 친필이 아닌 컴퓨터 한글 폰트). 안채 왼쪽으로 뒷산을 업고 세워진 김남주 흉상 옆에는 원형 벽이 있다. 그리고 거기 그의 절창 「조국은 하나다」가 철판에 새겨져 있다. 7연 80행에 이르는 긴 시다. 녹슬어가는 철판의 검붉은 색감은 비에 젖어 더욱 비장했다. 흉상 주변에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사랑은」, 「자유」, 「노래」 등 시비가 있는데 「조국은 하나다」가 주 조형물이다. 다른 시비들은 조형물에 그리 큰 노력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다. 시비의 글씨도 모두 컴퓨터 폰트의 궁체였다. 신영복이 궁체의 형식이 민중 문학의 내용을 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고 새로운 서체를 만들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가 얘기한 민중 문학의 주요 목록이 신경림·신동엽·박노해 등이었다. 신영복은 김남주의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그 특유의 민체로 썼다. 궁체가 불경을 쓰고 성경을 쓰기에는 그 우아한 분위기가 어울리지만, 그것으로 신동엽의 「금강」, 신경림의 「새재」,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쓴다는 건 유리그릇에 된장을 담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 새로운 서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나중에라도 김남주의 시비들을 다시 세우게 된다면 그때는 신영복 체로 하면 좋겠다. 지금 서울에서 또는 대전이나 공주에서 신영복 한글 서체를 공부하는 분들이 줄잡아 50∼60명은 될 것 같은데, 이들이 신영복 한글 민체를 익힌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해도 될 것이다. 시의 형식과 내용이 진화하듯 붓글씨의 내용과 형식도 진화하고 있다. 「조국은 하나다」는 사람들의 가슴을 때리며 1980년대의 기나긴 어둠에 비수처럼 날아든 시다. 그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두려움에 떨며 입조심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소시민 나에게 그 시는 섬찟한 시였다. 1959년생 내가 자라 온 한국 사회는 그런 사회였다.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교과서 내용과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간다는 현실의 공포를 함께 세뇌받아온 나에게 그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살던 동네 어른 하나가 유신 때 어떤 선거를 ‘개투표’라고 말했다가 경찰에 불려 다닌 적이 있었다. 그가 ‘개’가 한자 ‘개(皆)’였으며 따라서 ‘모두가 하는 투표’였다는 의미였노라고 주장하던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어렴풋이 어떤 모순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공포심을 내면화했다. 내가 어렸을 적 익힌 경찰의 이미지는 ‘무서움’이었다. 그 공포 언어의 목록에는 ‘순사’와 ‘상감’이라는 낱말이 있었다. 나중에 순사는 일제 강점기 용어이며 상감은 산감(山監)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 시절 산에 나무하러 갈 때마다 혹시 ‘상감’한테 들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함께 있어야 했다. 나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전까지 겨우 신문을 보며 비판적 언어에 가까스로 닿아 있었을 뿐이고 비로소 대학에 와서 ‘제국주의’니 ‘독재 타도’니 하는 언어에 닿을 수 있었다. ‘미제’니 ‘노동 해방’이니 하는 말들이 처음 내게 다가왔을 때 역시 섬뜩했다. 김남주의 언어는 내 머리에 언어의 혁명을 일으키는 회오리였고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피가 튀는 언어들이었다. 박노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5년에서 1988년까지의 시간, 김남주는 박노해와 함께 문학의 전위였다. 이른바 1980년대를 가로지른 거대 담론 NL과 PD를 상징하는 두 인물 김남주(NL)와 박노해(PD)는 모든 청년 문사들의 전설이었던 것이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세상 밖으로 내던진 시집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은 독재의 심장에 날아드는 화살과도 같았다. 숨죽이며 그 시를 읽는 나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시민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다. 김남주의 생가에는 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공간이 하나 마련되어 있는데 바로 김남주가 감옥에서 지냈던 독방을 재현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안채의 왼쪽 위로 대밭을 등지고 세워진 작은 구조물. ‘내가 수용되어 있는 사동은 소위 좌익수들이 감금되어 있는 특수 사동으로서 시멘트 복도를 사이에 두고 문패에 1.06평, 정원 3명이라고’ 하지만 ‘방에 딸린 변소(뼁끼통)를 빼면 0.7평 정도밖에 안 되’는 공간, ‘복도에서 가로 1m 세로 1.5m 철문을 끌어당기고 들어가면 비좁은 공간이 강요하는 압력 때문에 금방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공간, ‘방의 바닥이 세로가 1.5m 가로가 1m이고 천정은 2m 높이’로 ‘나같이 체구가 작은 사람도 한 방 가득 차’는 공간, ‘거기다가 방에 붙어 있는 뺑끼통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옥중연서』에서)’ 찌르던 공간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지금 화장실 냄새도 없는 그 공간에 조 선생님과 나는 서로 번갈아 들어가 보며 사진을 찍는다. 그가 「길」에서 ‘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 억압의 사슬에서 민중이 풀려나는 길이고 / 외적의 압박에서 민족이 해방되는 길이고 / 노동자와 농민이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다’라고 쓰며 투쟁의 의지를 단련하던 공간에서. 그가 유년의 천진함을 보낸 집 옆에 그의 몸과 문학과 사상을 가두었던 감옥의 공간을 나란히 대비시켜 놓은 것은 다른 문학관이나 생가에서는 볼 수 없는 김남주 생가의 특별함이다. 앞으로 김남주 문학관을 지을 계획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김남주 문학관은 김남주 생가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문학을 더 공부시킬 요량으로 몇십억의 예산을 들여 김남주 문학관을 짓고 거기 그의 삶을 담아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그가 바라던 세상의 모습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미 생가와 이 감옥만으로도 김남주 문학관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는 대나무처럼 청청하게 살다가 낫에 베이듯 스러졌다. 출옥 후 불과 5년이 지났을 무렵인 1994년,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가 많았으나 죽음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지 않으니 때가 되면 인정사정없이 데려간다. 아쉬움을 남기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마는 그의 죽음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의 삶의 선명함과 죽음의 난데없음이 어딘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인간이 누리는 보편적 수명조차 누리지 못하였고 그의 시의 전율을 더 느끼고 싶어 하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몇 가지 상념이 휘감아왔다. 문득 떠오른 것은 ‘아 김남주는 구질구질한 삶을 이어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1994년은 이른바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몇몇 운동가와 작가들의 변절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시절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형식을 갖추어가고 있었고 운동권들 상당수는 정치권으로 옮겨갔다. 1986년에서 1987년에 이르는 혁명적 열기는 직선제 쟁취로 변곡점을 지났다. 시민 사회는 변혁 운동 세력의 동력이 되어 주지 않았다. 직선제 정도로 만족한 중산층과 대중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갔고 운동 세력들은 여전히 사회 변화를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전처럼 활기차지도 신이 나지도 않았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하면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대중들은 염증과 기피를 섞어가며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시절이었다. 거기다가 김영삼이 노태우와 3당 합당을 하면서 민주주의는 드디어 기득권 세력의 장난감 정도로 가벼워지고 있었다. 김남주가 죽은 해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다음 해였다. 문민정부라 이름 붙여진 그 시절 타도해야 할 독재는 사라졌지만, 일상에서 독재의 잔재들은 아무것도 죽지 않았으며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시적이거나 폭력적인 탄압이 뒤로 숨어 들어갔을 뿐이었다. 반독재의 상징이던 김대중도 대통령 선거에 나서서 연거푸 두 번이나 떨어졌으니 이제 정부를 향한 모든 요구는 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힘을 얻지 못했다. 민주적인 제도 내에서 선거를 통해 사상의 자유도 쟁취하고 노동조합도 힘을 얻어야 하고 여성운동도 인권도 복지도 거리에서 외치는 함성만으로는 대중의 환호를 요구할 수 없었다. 근엄과 결연함과 목숨을 건 자만이 투쟁하던 시절에서 나처럼 겁 많은 소시민도 마구 정부를 비판하고 심지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대통령을 풍자해도 되는 그야말로 코믹한 시대가 된 것이다. 정치가 가벼워진 것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군부가 중심이 되던 지배 권력은 이제 자본과도 결탁하여 더 교묘한 방법으로 저항을 통제하고 길들였다. 김남주가 적개심을 불태우던 ‘미제’는 여전히 강고했고 대중들의 증오를 광범위하게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문학도 투쟁의 전선에서 서서히 퇴진해갔다. 그것은 시의 시대가 가을 산의 낙엽처럼 스러져가는 모습과도 같았다. 작가들은 다시 파편화한 개인으로 가거나 난해한 시의 골방에서 길을 잃거나 버렸다. 산문들도 ‘옛날에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 하는 후일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의 소소함이 혁명가에겐 너무나 지루한 나날들이 아니었을까.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조직도 파괴되고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부끄럽다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징역만 잔뜩 살았으니이것이 나의 불만이다그러나 아무튼 나는 싸웠다! 잘 싸웠거나 못 싸웠거나승리 아니면 죽음!양자택일만이 허용되는 해방투쟁의 최전선에서자유의 적과 싸웠다 압제와노동의 적과 싸웠다 자본과펜을 들고 싸웠다 칼을 들고 싸웠다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나는 싸웠다-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에서 민족 해방, 노동 해방, 미제 타도 등 거대 담론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던 사람이 긴 영어의 세월에서 풀려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일상의 사사로운 일들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물론 나의 소시민적 감상이다. 돌아오는 길 나는 다시 노래가 된 그의 시를 떠올려 본다. 햇살은 없고 가을비가 심하게 차창을 때린다. 감옥 창살에 비추던 다람쥐 꼬리만한 햇살로도 가슴 따스해지던 순간이 있었던 사람 김남주 시인. 안치환의 절절한 목소리에 실린 노래를 가끔 따라 부르며 시인의 목을 휘감던 햇살을 더듬어보곤 한다.
시인 문학관 기행김남주의 흉상 앞에 섰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을 오후. 조각상은 거친 맛을 심하게 강조하여 제작되었는데, 지금 비에 젖어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다. 그의 삶이 투쟁의 빗물에 젖은 삶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광대뼈를 강조한 깡마른 모습은 스스로 ‘시인이 아니라 전사’라고 불리길 원했던 사람의 격렬함을 드러내고 있다. 조각상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 각도가 낮지도 높지도 않다. 아마 고개를 더 젖혔으면 애처로웠을 듯한데, 확고한 신념으로 목표를 향해 치닫는 사람의 형상이다. 또 다른 그의 흉상이 광주 중외 공원 비엔날레관 옆에 있다. 지난여름 들렀던 그 공원의 조각상은 여러모로 생가에 있는 조각상과 다르다. 우선 몸의 자세부터 어디에 기댄 듯 오른쪽으로 비스듬하다. 오른손을 귀밑에 대고 무슨 소리라도 들으려는 듯 고요하고 편안한 표정이다. 살이 약간 오른 얼굴에 옅은 웃음을 머금은 입가, 얼굴 피부의 겉 처리는 조각도의 흔적을 없애고 부드럽게 했다. 공원의 김남주는 눈빛 또한 따뜻하게 지상을 향하고 있어 그를 찾아온 사람의 눈과 마주하겠다는 각도다. 생가의 조각상은 안경조차 뿔테의 굵은 선을 한껏 강조했고 피부에서 띄워 놓아 자칫 건들면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반면 공원의 조각상은 안경을 피부에 닿게 안정시켜 놓았다. 몸을 부려 사는 노동자 농민을 너무 사랑해서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던진 사람! 1980년대라는 거대한 변화의 시대를 가로질러 달려갔던 불꽃! 어느 것이 김남주의 본질에 가까운 걸까. 중외 공원에는 조각상과 나란히 세워져 있는 「노래」 시비가 있고 생가의 조각상 옆에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시비가 있다. 시의 내용으로 보자면 공원에 있는 시가 전투적이다. 전투적인 조각상과 덜 전투적인 시, 전투적인 시와 덜 전투적인 조각상, 두 이미지가 교차하고 있다. 1박 2일 일정으로 나선 남도 문학 기행의 둘째 날 오후. 오전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들러보고 고정희 생가를 거쳐 도착한 김남주 생가는 먼저 본 곳과 너무도 다르다. 윤선도 유적지에 대비되는 곳으로 고정희 생가와 김남주 생가는 같은 위치에 있으리라. 대비되는 두 사물을 고찰해 보라는 듯 너무 다른 성격의 두 풍경을 보고 있는 셈이다. 고산의 집은 거대했고 김남주의 집은 초라했다(나중에 지도로 확인해 보니 김남주가 살던 봉학리 전체의 크기와 윤선도 유적지 터의 규모가 서로 10,000여 평 정도로 비슷했다!). 두 사람 다 당대와 불화하며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았으나 한 사람은 양반 집안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고 한 사람은 머슴 출신 소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감옥을 드나들며 투쟁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두 사람 다 권력과는 불화했지만 단지 양반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산은 거대한 저택과 원림 속에서 살았다. 권력 주변의 더러움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유배를 당했지만, 유배 기간 14년 5개월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녹우정과 보길도를 오가며 음풍농월하며 지내다 85세에 죽었다. 유배가 아무리 형벌이라고는 하나 일제 강점기에도 허락되었던 종이와 펜이 금지된 군사 독재 시절의 감옥과 비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김남주는 그런 감옥 생활을 9년 11개월이나 했다. 윤선도는 유배 생활 중 붓글씨로 국문학사에 길이 남는 한글 시조를 썼고 김남주는 감옥에서 칫솔을 날카롭게 갈아 우유갑이나 휴지에 시를 써야 했다. 시퍼렇게 날이 선 그 시도 국문학사가 존재하는 한 늘 거론될 것이다. 윤선도는 더 좋은 풍광을 즐기기 위해 인위적으로 숲과 산책로와 정자를 만들었다. 심지어 연못을 만들고 보기 좋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동자들에게 색동옷을 입혀 거닐게 하고 주변에 풍악을 울리게 하였다니 가히 그는 가진 자가 누릴 수 있는 오락의 극점까지 갔다 하겠다. 한 사람은 단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려서부터 뼈 빠지게 일하고 독재에 맞서 싸우다 수배되고 감옥에 갔다. 그리고 출옥한 지 얼마 안 되어 49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김남주 생가와 윤선도 유적지의 거리는 30리 안팎. 하루 사이에 이렇게 다른 두 인생 역정을 돌아보는 기행은 가을비보다 차고 쓸쓸하다. 내 글에서 다룬 시인 가운데 그가 살아생전에 내가 만나 본 유일한 인물이 김남주다. 내가 의욕적으로 쫓아다녔다면 서정주, 박목월, 조병화, 박두진 등은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20대 청년이 된 이후까지 살아 있었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를 직접 만나서 문학적인 그 무엇을 얻거나 확인할 필요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문학만 그러하겠는가. 철학자를 한두 시간 만나서 철학을 배우겠는가. 부지런히 다니면서 작가를 만나거나 강의를 듣지 않는 게으름, 또는 직접적인 관계보다 독서를 통한 만남을 신뢰하는 백면서생의 변명으로 삼기엔 궁색한 말이지만 나는 사람을 만나는 일에 별로 적극적이지 못하다. 그저 멀리서 그들의 소식을 듣고 시집을 보며 만났기에 대개 시인들의 모습은 정지된 사진의 이미지 정도로만 내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러니 내가 김남주를 생전에 한 번이라도 만난 것은 특별한 경험이라 하겠다. 그것도 네댓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며 그가 풍기는 인간적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내가 전교조나 민예총에 관계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작가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느낀 아쉬움 중 하나는 어떤 작가들의 경우 직접 만난 후 작품의 맛이 반감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관이나 생가 기행은 그렇지 않다. 시의 배경은 시를 배반하지 않는 것 같다. 시인이 태어난 집, 시인이 살던 마을, 시인이 보고 거닐었을 들과 산과 골목은 시인의 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시의 서정을 확장한다. 풍경은 시인 이전의 것들이라 그런 걸까. 윤동주의 고향 용정 가는 길에 동행했던 평론가 홍용희 교수는 ‘좋은 시는 여섯 살 이전의 언어로 만들어진 시다.’라고 말했다. 문학관이 있는 곳은 시인들의 여섯 살 이전의 언어가 가득한 풍경화다. 김남주 생가는 김남주가 태어나 살았을 어린 시절의 모습을 다른 어떤 생가보다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비록 과거의 초가지붕은 검은 양철 지붕으로 바뀌었지만, 가옥 자체를 새로 지은 것은 아닌 듯했다. 김남주의 아버지가 마련한 집은 그 아버지가 마련했던 집이다. 아버지의 성화에 날이 새기 무섭게 들판으로 일하러 가야했던 김남주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살던 집, 70세가 되어서도 밭에 나가 일을 했던, 애꾸눈 각시였던,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 대학생 때 유신에 반대하는 첫 지하신문 「고발」을 제작하여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후 29세의 나이에 돌아와 「진혼가」 등의 시를 지은 집이다. 그리고 그가 30세, 고향을 떠나 광주로 가서 서점 카프카를 개설하고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더는 고향에 와 머물지 못했다. 전사로, 시인으로, 번역가로 뜨겁게 살다 폭발하듯 죽었다. 내가 김남주를 만난 것은 1990년 무렵이었다. 영동 출신 시인이자 민예총 활동가로 당시 전국을 누비고 다녔던 양문규가 김남주를 영동에 모셔 왔다. 그 무렵 김남주는 종종 영동에 왔었다고 한다. 나까지 셋이서 박운식 시인의 집인 황간면 용암리에 들러 저녁을 먹고 용산으로 나왔던 일정이 있었다. 왜, 무슨 일로 갔는지 알 수 없고 다만 용암리에서 용산으로 나왔던 그 밤길만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추억이라고 말하면 좀 궁상스러울까. 그의 목소리는 맑았고 목 안쪽에서 나는 낭랑한 저음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성은 대체로 목 바깥쪽에서 나는 소리다. 영어는 주로 목 안쪽에서 소리가 나는데 우리말을 그렇게 발음하는 김남주 시인은 좀 특별한 경우이다. 나는 그의 음성에서 선동적인 감수성이 묻어나온다고 느꼈다. 핏대를 올리며 선동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보통의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무언가 강력한 힘을 가진 듯이 울려왔다. 지금 추측해 보니 그가 몹시 바쁜 중에 영동에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양문규가 김남주를 박운식의 집에 안내한 것은 그가 당시 농민 시를 쓰는 시인 중에 거의 유일하게 실제 농사를 지으며 사는 분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1988년 출옥 후 바쁜 일정으로 전국의 시민사회단체와 운동권 사람들, 시인, 독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중이었던 김남주의 마음에도 닿을 만한 진짜 ‘농투사니’ 시인이 박운식이었으니까 말이다. 밤길을 걸으며 나는 당시 유행했던 노래를 불렀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 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나는 그 무렵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고 있었다. 전교조 활동으로 한참 교육 운동에 열이 달아 있던 때였다. 그날 가사의 어느 부분인가를 까먹고는 다 부르지 못하고 흐지부지했다. 노랫말은 생가의 시비에 있다시피 원시와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런데 김남주의 말이 뜻밖이었다. “아, 그 시가 노래가 되았는지는 몰랐는데…….” 영동 황간면에서 용산으로 가는 밤의 들판 가운데 길이었다. 정작 시인 자신은 그런 노래가 불리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게 좀 뜻밖이었지만 그게 뭔 상관이랴. 낮고 맑은 음색의 선뜻한 그날 그 목소리는 지금도 내 귀에 쟁쟁히 살아 있다. 나중에 김남주의 육성 영상을 찾아보니 그 서늘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시인 문학관 기행오장환은 낯선 이름이다. 문학계에서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문학관을 찾는 이들에게조차도 오장환은 그리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최근에는 그의 시가 대학 수학 능력 시험에도 출제되고 있긴 하지만 그동안 내가 거쳐 온 중고등학교 과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에서도 좀체 만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문학사를 기술할 때도 오장환은 그렇게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오○환’이라는 등의 이른바 금지 문인 이름에도 많이 오르내리지 않았다. 해방 직후 1947년 중학교 교과서에 그의 시 「탑의 노래」가 실렸지만, 그것이 대중의 기억에 남아 전해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낯선 이름이 나의 인식 속에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은 1996년에 오장환 문학제가 시작되면서부터다. 문학제가 치러지고 생가비가 세워지는 과정, 문학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틈틈이 그 소식을 듣고 때로 참여하기도 했다. 오장환을 시인의 길로 이끈 스승이자 옆 동네 선배였던 정지용의 경우 1988년 납·월북 작가에 대한 금기가 풀림과 동시에 바로 문학제가 열리고 뒤이어 시비가 세워지는 등 활발한 기념사업이 전개된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해금된 지 8년이 지나서야 문학제가 시작된 것도 그렇고 문학관이 2006년에야 개관한 것만 보아도 문단 안팎에서 오장환에게 보낸 관심이 그리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활동했던 서정주나 이상, 이육사 등에 비하면 턱없은 무명이었다. 더구나 그는 당대에 ‘문단의 새로운 왕’이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주목할 만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 주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른바 해방 공간에서 북한을 선택하여 간 ‘월북 작가’에 포함된 경우, 말하자면 논란의 시비가 없이 확고한 ‘빨갱이’였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모두 입을 다물어야 안전한 시절이었으니까. 다른 하나는 인기 있는 작품이 없었다는 것, 오장환 문학이 이룩한 성취가 특별한 것이긴 하지만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준 작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른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6·25 전쟁 후 오장환의 이름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82년 오송회 사건 때였다. 간단히 말하면 ‘죄 없는 시민을 빨갱이로 만든’ 사건이었다. 불길한 이름은 계속 불길한 이름으로 남한 사회에 각인되었다. 말하자면 근대의 시작과 함께 불온했고 21세기인 지금까지 ‘빨갱이’는 불길한 단어이다. 그 단어는 조선 시대의 어휘 ‘반역자’의 현대 번역어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 낙인용 어휘는 ‘종북’이나 ‘포퓰리즘’이라는 명찰을 달고 계속 우리 사회를 들쑤시고 있다. 아기의 입놀림을 ‘옴줄옴줄’이라고 원고지에 펜을 꼭꼭 눌러 썼던(「애기 꿈」) 손, 누나가 그리워 살구도 따 먹지 않고 한나절 가슴 저리던(「편지」) 서정을 우리는 영원히 곁에 두기 어려운 걸까. 저 섬세하고 여린 감수성의 문장이 체제에 불온한 걸까. 정치 권력은 영원히 그 어느 한편에 ‘불온’이나 ‘가상의 적’을 만들어 놓고 싶은 모양이다. 까발려진 들 체제에 별 영향도 없는 것들을 ‘불온’으로 과대 포장하고, 실제보다 훨씬 크게 부풀려진 ‘가상의 적’을 수시로 꺼내 들면서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내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나 보다. 그런데 이승만을 추종하는 세력이 보기에 좀 기분이 나빴는지 모르지만,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이 교과서에 실린 이후에도 남한 사회는 별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다. 동시, 산문시, 자유시 등 작품마다 내용과 형식을 조금씩 달리하긴 했지만, 오장환은 일관되게 인간을 위한 문학을 우선했다. 그는 ‘참다운 인간’의 시선으로 시대와 사회를 보려 했다. 공장 속에선 무작정하고 연기를 품고 무작정하고 생산을 한다. 끼익 끼익 기름 마른 피대가 외마디 소리로 떠들 제 직공들은 키가 줄었다. 어제도 오늘도 동무는 죽어 나갔다. 켜로 날리는 먼지처럼 먼지처럼 산등거리 파고 오르는 토막들 썩은 새에 굼벵이 떨어지는 추녀들 이런 집에선 먼 촌 일가로 부쳐온 공녀들이 폐를 앓고 세멘의 쓰레기통 룸펜의 우거(寓居)―다리 밑 거적때기 노동 숙박소 행려병자 무주시(無主屍)―깡통 수부는 등줄기가 피가 나도록 긁는다. - 「수부」에서 장시 「수부」의 한 곳, 수부란 서울을 말함이다. 도시로 몰려든 농촌 이탈민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를 그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하 1930년대 후반 서울은 공장이 늘어나고 인구가 급격히 불고 있었다. 오장환은 어둡고 풍자적인 어조로 도시의 비참함을 그렸다. 이 시를 쓸 때 그의 나이 열 아홉. 천재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그 나이에 전쟁을 묘사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지금의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얘긴데 전쟁을 그렇게 그리고 있었다니! 인간의 목숨과 캠플 주사(심장마비 방지 주사)가 동격으로 취급되는(「전쟁」) 모습, 그가 읽은 시대와 인간 세상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아수라였던가. 오장환이 집중한 것 가운데 전통 사회의 모순과 동시에 전통 사회의 따뜻함이 있다. 신분 사회의 부조리와 여성 억압의 허위성을 파헤치거나 족보와 가부장제를 존숭하는 전통 사회의 허상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라고 「성씨보」에서 노래하고, 「정문」에서는 유교적 가치가 조선 땅에서 어떻게 일그러져 한 여인을 자살로 내몰고 지배층은 그 위에 다시 어떤 야만을 행하는지 보여 준다. 그리고 어느 인간이 안 그러랴마는 오장환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가 해방 공간에 펼친 열렬한 인민 문학 운동과 이상 사회를 향한 열정적인 활동은 전통 사회에서 경험한 따뜻함, 곧 어머니로 표현된 희생과 헌신의 사람들에게 올린 헌사이다. 기존 전통 사회의 현장인 고향은 모순이 가득 찬 곳이지만 그 모순의 질곡을 지고 살아가는 어머니는 늘 희생과 온화의 얼굴로 오장환을 감싼다. 오장환은 자신과 자신의 시가 어떤 운명을 걷게 될지 예측했을까. 해방과 함께 오장환은 해방 전에 쓰던 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열정적으로 현실주의 문학에 매진한다. 새로운 나라 건설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해방의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모순의 족쇄가 가득하던 식민지가 끝나고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걷어낸다면 그곳에 전쟁도 없고 신분 차별도 없고 노동의 소외도 없는 모두가 행복한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에 전율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해방 공간에서 그의 열정적인 활동은 극우의 테러를 당하고 결국 오장환은 북한을 선택해 간다. 북한으로 가면서 남한에 대한 기대를 접었을 테니 그는 적어도 북한에서 시집 『붉은 기』를 낼 때까지는 제 죽음과 함께 자신의 시가 북한 문학사에서 그렇게 깨끗하게 지워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되레 그가 버리고 떠난 남한에서 그의 기념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가 북한을 선택하여 갈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당시 북한이 그를 받아들일 만큼의 ‘인민’ 중심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었고 남한은 ‘자본’ 중심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북한은 인민의 범위를 점점 좁혀 들어가 그가 찬양했던 중심 권력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제거하면서 임화를 비롯한 월북 문인들을 숙청하고 그들의 작품조차 지워버렸다. 오히려 자본의 파이가 커진 남한은 인민의 힘도 함께 커져서 이제 오장환의 ‘인민’ 정도는 품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98살이다. 지난주(9월 22일~23일) 오장환 문학제가 열렸다. 2018년 탄생 100주년 문학제가 준비되고 있다. 그의 빛나는 감수성은 지금 어디 있는가.
시인 문학관 기행남한에서 유일한 월북자의 문학관. 6·25 전쟁 전에 월북하여 북한에서 죽은 시인의 문학관이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에 있다. ‘오장환 문학관’이다. 오장환 문학관에 관한 설명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다양한 반응을 동시에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오장환 문학관은 오장환의 ‘문학’을 기리는 곳이다. 오장환의 말처럼 제대로 된 문학은 ‘문학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문학’이고 우리는 그 ‘인간을 위한 문학’을 오장환의 문학 작품 속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좀 특별한 기행이었다. 그동안 주로 혼자 가거나 몇 사람의 지인들과 동행했다. 이번에는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모았다. 처음엔 대전의 시민 단체 레츠(대안 화폐 운동을 하는 문화 공동체) 회원들과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옥천과 대전 그리고 청주에서 참가한 사람들이 있어 스무 명이 좀 넘었다. 교사, 만화가, 건축학과 교수, 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최근에 동학 관련 책을 낸 고은광순 씨(옥천군 청산면 귀촌)가 참여해 보은군과 동학에 관해 잠시 설명해 주셨다. 오장환 문학관에는 임선빈이라는 수필가가 있다. 오장환 문학관이 만들어진 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그곳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다. 마치 오장환의 연인처럼 엄마처럼 거기 살고, 문학관 방문객들을 애인이나 자식이라도 맞이하는 듯이 반긴다. 직접 따 만든 국화차를 끓여 내오거나 직접 기른 옥수수, 감자, 고구마를 쪄 내오는 일이 어찌 간단한 일이겠는가. 더구나 그는 문학관 주변을 직접 관리하고 가꾼다. 전국 문학관 어디에도 이런 예는 없다. 대개의 문학관에는 업무를 보는 분들이 계시다. 멋있게 해설하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분을 만날 수는 있지만 방문객을 자신의 낭군처럼, 집 떠난 자식이 돌아왔을 때 반기던 어머니처럼 맞이해 주는 곳이 있던가. 이번에 갔더니 밖으로 떠돌다 돌아온 탕자를 맞듯이 마당에 가득한 해바라기가 환하다. 그리고 그 해바라기를 심고 가꾼 임선빈 씨가 해바라기보다 더 환하게 문간에서 나와 방문객들을 맞는다. 오장환이 「다시 미당리」에서 노래한 어머니의 모습이 이와 비슷했을까. 오장환 문학관은 그래서 사람이 살고 있는 집과 같다. 이번 방문 전 나는 오랜만에 사전 연락을 드렸다. 미리 연락을 하고 가면 너무 융숭하게 환대해 주시는 게 좀 부담스럽고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연락을 안 드리고 깜짝 방문을 했던 적이 있는데 얼마나 화를 내시는지 무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옥수수를 한 소쿠리 쪄 내오시지 않았던가. 나는 다시 감동하면서 부담과 압력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스물이 넘는 우리 일행이 모두 두세 개씩이나 먹고도 남는 양이었다. 다음에 갈 땐 연락을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거 원. 임선빈이라는 사람이 있어 오장환 문학관은 살아있고 오장환 생가는 진짜 살아있는(生) 집(家)이 되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지금부터 40여년 전에 회인면에 온 적이 있다. 나는 구미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방학을 이용해 같은 반 친구를 찾아 왔던 것이다. 얼마 전 그 친구와 소식을 주고받으며 확인했더니 공교롭게도 현 오장환 문학관 자리가 그 친구의 집터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문학관 자리에 40여년 전 내가 왔었다는 얘기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내리다 친구의 집에 닿았던 기억이 있다. 전에 와서 하룻밤을 머문 옛 친구의 집과 문학관이 겹쳐지는 곳에 들어서는 그 묘한 심사라니! 산골 마을이다 보니 마을의 환경이 대도시처럼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문학관 주변의 집들 가운데 여전히 예전의 돌 담벼락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도로가 넓어지고 차가 늘어나고 시멘트 건물이 생기고 젊은 사람들이 떠나가는 등의 변화는 우리나라 모든 마을이 겪은 변화이지만 이곳은 지금도 궁벽진 시골 마을이다. 몇 년 전 청주―상주 간 고속 도로가 뚫리면서 회인 나들목이 생기고 교통이 편리해지긴 했다. 그래도 옥천군에서 회인면에 닿으려면 해발 300미터가 넘는 수리티재를 넘어 한 시간 가까이 차를 달려야 한다. 안남면을 거쳐 가는 동안의 산세도 그리 얌전한 것만은 아니다. 40년 전 이곳에 오기 위해 아마 나는 하루를 다 소비하지 않았을까. 청주시로 갔는지 보은군을 거쳐 갔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다만 비탈길을 내려가는 버스에서 바라보던 언덕 아래 초가집 풍경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뭘까. 그때까지 그렇게 큰 산을 버스로 넘어 다닌 적이 없었다는 게 한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나는 그 나이 때까지 내가 살던 곳 옥천을 벗어난 적이 전혀 없는 촌놈이었다. 수학여행으로 서울의 남산과 경주의 불국사를 다녀온 것이 내 여행의 전부였던 것. 오장환이 살던 당시 이곳은 내륙의 오지 중 오지였고 그래서 더 평화롭고 아늑한 곳이었으리라. 마을 앞으로는 피라미 몇 마리가 아이들을 유혹할 만한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동북쪽 국사봉과 구룡산 사이에서 흘러오는 물이다. 박인환의 고향 강원도 인제군과 같은 험준함은 아니지만 오장환의 고향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오장환이 이곳에 산 것은 보통학교 3학년 때까지다. 그때 그의 성적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미술 쪽이었다고 한다. 그가 10살 때 온 가족이 이곳을 떠나 오씨의 선산이 있는 집성촌 안성으로 간다. 그곳에서 박두진과 한반이 되어 안성보통학교를 다니고 14살 때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운명의 정지용을 만난다. 오장환의 생애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잦은 이동이다. 이는 그의 시에서 보헤미안의 감성으로 나타난다. 그는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18살에 일본으로 간다. 19살에 다시 서울로 왔는데 20살에 다시 일본 명치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것도 중퇴하고 21살에 다시 서울로 온다. 23살에 다시 일본으로 갔다가 얼마 후 되돌아온다. 18살 때 처음 일본에 가서 다닌 학교는 지산중학교라고 하는데 1년짜리를 수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교 생활도 전반적으로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도 당시로서는 아주 늦은 30살에 하게 되는데 서정주는 오장환이 스무 살 때 1년 정도 살았던 여인이 있었다는 증언을 했다는데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고 한다. 그의 삶에 어떤 알 수 없는 떠돎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떠남과 돌아옴의 이미지, 방황이나 방랑하는 자의 눈으로 보는 세상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 안착하지 않은 것 같은 쓸쓸함, 그가 어떤 대상을 향하여 격렬하게 환호하며 지지를 보내는 정서는 해방 후 북한, 러시아를 거치는 기간에 쓴 시들에 나타난다. 어린 시절은 그리 궁핍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휘문고보 다닐 때 수업료를 내지 못해 정학처분을 받을 것을 보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고급 취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돈을 다른 곳에 탕진했거나 집안이 어려워졌을 수 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직접 돈을 벌어야 했고 신문 배달도 했다고 한다. 그가 가진 직업은 남만서방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한 것 정도였는데 여기서 서정주의 『화사집』과 김광균의 『와사등』이 나왔으니 문단에 중요한 시집을 낸 셈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오장환 사진이 한 장 있다. 큰 깃을 가진 두툼한 외투 속, 얼굴의 각도가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채 포마드를 바른 듯 단정히 빗어 올린 머리와 넥타이. 지금은 보기 힘든 스타일이다. 오장환은 잘생겼다. 요즘말로 하면 꽃미남이다. 이미 죽어 없어진 사람의 얼굴을 그것도 사진을 보고 말하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오장환은 예쁘장한 귀공자 얼굴이다. 성격파 배우 역에 알맞을 김수영이나 시원시원한 북방의 남성성을 풍기는 백석, 미남형이지만 눈꼬리가 쳐진 박인환과는 차별되는 도도함과 귀여움이 오장환의 얼굴에 있다. 윤동주의 눈빛에 서린 슬픔의 그림자도 그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삶은 꽃처럼 아름답지도 않았고 귀공자처럼 귀함을 받지도 못했다. 그는 방황하며 때로는 현실과 싸우며 치열하고 뜨거운 순간들을 살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34살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러나 그는 대체로 현실적, 개인적 호사와 욕망에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던 같다. 이 세상과 사회를 보다 이상적인 어떤 곳으로 바꾸어야 하고,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민한 촉수로 자신의 시대 대부분의 조건들에 관해서 날선 비판의 시를 쓰며 이상적인 그 무엇을 위해 고민했다. 그는 신분을 차별하고 여성을 억압한 봉건 이데올로기, 식민지 현실, 제국주의, 전쟁, 근대 도시의 비인간성을 비판했다. 스무 살 무렵 ‘문단의 새로운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해방 전 글 속의 오장환은 대체로 쓸쓸했다(모든 왕들이 쓸쓸했나?). 1940년대 민족의 암흑기엔 글을 쓸 수 없었고 해방 후에는 열렬히 현장 문학에 매진했으나 곧 극우의 테러를 피해 북한으로 가야 했다. 병든 몸을 치료해 준 북한 정권은 그에게 축복이었고 치료차 갔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에 열광했지만 곧이어 닥친 6·25 전쟁은 그의 몸을 돌보기엔 너무 혼란한 격류였다. 그가 죽고 전쟁이 끝난 후 남한에서는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그에 관한 금기를 풀었고 차츰 다양한 연구와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도 북한에서는 그의 문학을 별로 취급하지 않고 있으며 이름 석자 거론하는 정도라고 한다(하긴 우린 지금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다. 아! 나도 깜빡 잊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남(연합군)과 북(중국)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또는 정전) 상태다. 대한민국은 협정에 서명도 안했다.).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예 흙이 향그러 단 한번나는 울지도 않었다. (중략) 단 한번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그를 좇아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나의 노래」 중에서 그의 노래는 끝난 것일까. 지금 그의 무덤은 어디이며 거기 꽃은 피었을까. 어둡거나 쓸쓸한 기색 없던 그의 얼굴 어디에 그의 짧고 격렬한 삶의 이력을 겹쳐 볼 수 있을까.
시인 문학관 기행윤동주는 어려서부터 동시를 썼고 숭실중학교를 다닐 때 교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에 몰두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정지용을 찾아가 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윤동주는 문과에 입학할 때 의과 진학을 고집한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로 보아 그는일찍부터 문학에 관한 간절한 열망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윤동주가 일본으로 가서 계속 영문과에 적을 둔 것도 문학에 관한 그의 지향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원래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무렵 시집을 내려 하다 주위에서 시집 발표 때문에 생길지도 모르는 위협을 우려하여 만류하였고, 후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결국 그 시집은 해방이 된 후에서야 발행되었다. 그것도 동주가 없는 세상에서. 그 시집이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그가 일본에서 릿쿄대학교를 다니다가 도시샤대학교로 편입한 이유 중 하나가 정지용이 그곳을 다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시인의 삶을 꿈꾸었는지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가슴이 저린다. 다만 시를 사랑하였을 뿐인 순결한 청년 윤동주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채 남의 나라 땅에서 숨져야 했다. 우리는 지금 언제 어떻게 발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시를 쓰는 시인의 가슴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시 「병원」은 마치 나라 전체가 병들어 버린 현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시를 어떤 여인에 관한 사랑으로 읽는다 하더라도 그 사랑은 불가능의 단어들로 가득하다. 찾아오는 이도 없고, 나비 한 마리도 없고, 아픈데 병은 없다는 늙은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만 하는 사랑이다. 없는 것이 가득한 사랑이다. 살구나무와 금잔화 꽃 한 송이가 그 고립된 사랑의 위로가 될 수 있었을까. 윤동주의 시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쉽지만 가볍지 않고, 가볍지 않지만 우리를 지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어느 고요하고 낯선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잠시 생각하게 한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다니며 기숙사에서 머문 기간은 3년 정도, 스물두 살 때부터 스물네 살 때까지다. 한 인간의 생애 가운데 가장 빛나는 시간을 이 공간에서 살았다. 그때는 식민지 조선의 운명이 나날이 기울어 가던,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발악하듯 한반도를 옥죄던 시절이었다. 정지용의 경우 1940년대가 되면서 절필하고 글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역사상 가장 많은 파괴와 학살이 있었다는 제2차 세계 대전이벌어지던 시기였다. 윤동주가 희미한 불빛 아래 「서시」를 쓰던 때가 바로 1941년이었다. 시가 설 자리가 없던 시절에 시를 쓴것이다. 윤동주는 만년필로 시를 썼다. 그의 글씨는 그의 눈빛처럼 부드럽고, 원고지의 네모 칸을 벗어난 적이 별로 없는 음절들은 굳게 다문 그의 입술처럼 견결하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겠다는 듯이,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듯이. 기념관 앞에는 「서시」를 육필 그대로 옮긴 시비가 있다. 당시 기숙사였던 건물을 나오면 바로 앞, 윤동주가 거닐던 공간이다. 획 하나하나를 천천히 그어 간 그의 손놀림이 느껴진다. 내가 시비를 바라보며 섰던 자리를 윤동주도 거닐었을 것이다. 윤동주 문학관은 윤동주가 종로구에 살았다는 것을 근거로 종로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쓰여진 시」 등을 이곳에 사는 동안 썼다. 이 문학관은 구조로는 단연 현대적 감각을 보여 주는 곳이다. 내가 그동안 다녀 본 모든 문학관은 건물의 구조가 기본적으로 ‘집’이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상자형태다. 한마디로 집이 아니었다. 본래 상수도 관련 기계 시설이 있던 가압실과 두 개의 물탱크를 개조하여 만든 독특한 이력을 가진 건물이다. 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생애를 설명해 놓은 작은 액자들이 벽에 걸려 있고 중앙에는 용정에서 가져온 우물용 목재를 설치했다. 이곳은 사실 복제본 육필 원고 외에는 윤동주 관련 자료가거의 없다. 자료 대부분은앞서 말한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관에 있다. 그러나 1전시실에 이어진 두 개의 공간(2전시실-열린 우물, 3전시실-닫힌 우물)은 건축가의 뛰어난 감각을 맛보게 한다. 두 개의 물탱크 중하나는 영상실(닫힌 우물)로, 하나는 전시실과 영상실을 잇는 공간(열린 우물)으로 만들었는데 ‘잇는 공간’의 물탱크는 위쪽을 뚫어 하늘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묘한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그것은 어딘가에 갇혀 있는 느낌, 벗어날 수 없는 폐쇄의 공간에 놓인 것 같은 느낌이다. 눈을 들었을 때 사각의 하늘이 뚫려 있다. 윤동주의 생애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간단하게 이것이 윤동주의 시대가 주던 억압과 윤동주가 꿈꾸던 희망의 몽타주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더구나 벽에는 시멘트 물탱크의 내부에 오랫동안 쌓인 얼룩을 그대로 두어 걸어가는 동안 옷깃에 스친다. 영상실 또한 물이 찼던 시멘트벽의 얼룩 위로 영상을 뿌린다. 마치 상처의 배경에 윤동주의 삶을 보여 주면서 시대의 흔적과 관람자를 대면케 하려는 것처럼. 집을 오직 생존과 주거의 공간으로만 인식해 온 나에게 이런 경험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공간 자체를 서정과 서사의 공간으로 만들어 그곳에 들어선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흔드는 것, 그것이 현대 건축의 힘인가 싶다. 이는여행지에서 잠깐 맛볼 수 있는 경험일지도 모르지만 그여운은 오래 남는다. 내가 그동안 다녀 본 몇몇 기념관과문학관 중에서 근래에 문을 연 충청남도 부여의 신동엽 문학관, 제주특별자치도의 추사관 등에서도 바로 이런 낯선 공간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건물 뒤로 오르막이 이어지는 언덕은 서울 북서쪽을 감싸고 있는 인왕산 자락인데 종로구에서는 이곳을 시인의 언덕으로 명명하였다. 윤동주가 걸으며 내려다보았을 서울의 풍광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겨울과 봄이 겹치는 계절의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즐기고 있다. 윤동주도 이런 시간에 여기 있었을까. 그도 햇살 속의 저 풍광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을까.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내가 옥천에 살면서 정지용 문학관에 가까워지게 되고 언젠가 시인들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 첫 번째 손님을윤동주로 삼은 것은 그의 시를 가슴에 품은 뜻도 있었지만, 정지용과 그의 친연성 때문이기도 했다. 정지용이 윤동주 시집의 서문을 썼고 서로 도시샤대학 동문이라는 것, 도시샤대학에 두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는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도시샤대학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두 사람의 시 세계는 다르지만 적어도 두 시인은 암울한 시대를 건너오면서 시인의 이름을 오염시키지는 않았다는 게 어떤 위로가 된다. 그들이 죽고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대의 그늘이 말끔히 지워졌다 하기는 어려우니 어찌 그 이름이 새록하지 않겠는가. 두 시인은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일본의 왕을 찬양하면서 살아남아 오래오래 변명을 일삼던 어떤 시인들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지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에서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와 나눈 이야기를 소개한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샤쓰나 거저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끼지 않읍데다.”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수용된 지 2년 만에, 불과 해방을 6개월 앞두고 죽는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하에서 죽는다. 공식적으로 그는 일본의 신민으로 태어나 만주, 한반도, 일본에서 일본의 신민으로 살다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국어를 가장 서정적으로 만든 시인이었다. 발표할 희망도 없는 시를 쓰며 수행자처럼 묵언하는 청춘을 살다가 죽어 간 시인,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까. 다시 길을 떠나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시인 문학관 기행3월 하순 오후. 서울시 종로구의 윤동주 문학관 앞. 연세대학교에 있는 윤동주 기념관을 거쳐 지금 막 도착했다. 창의문로의 외곽 풍경이 가까이 펼쳐진다. 윤동주 문학관 기행을 하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시는 「서시」였다. 국어 교사로 살면서 아이들에게 수없이 가르쳤고 해마다 새롭게 만나는 아이들에게 첫 번째 암송 시로 「서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수업 종이 울리고 교실 문에 들어서면서 나는 “서-시! 윤-동-주!”라고 외치며 잠시 문 앞에 서 있곤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고 암송을 시작했다. 왜 윤동주의 「서시」를 첫 암송 작품으로 제시했을까. 교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이런저런 갈등과 고통이 한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서시」는 우울한 날 혼자 읊조리며 자신을 다독거리기에 좋았으니까. 그러나 꼭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서시」만큼 무결점의 시로 꼽을만한 게 있을까 싶다. 아무튼, 언제부턴가 윤동주의 「서시」는 아이들에게 암송하게 할 첫 시로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외우기 적절한 길이, 쉬운 낱말, 내면을 향한 고요한 성찰과 다짐, 청춘의 우울과 쓸쓸함이 담긴 시어, 어둠이 스쳐 간 시대의 뒷모습, 이런 것들이 이 시의 아프지만 단단한 힘이라고 할 것이다. ‘부끄럼’과 ‘괴로움’과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요즘 세대 아이들에게 그리 썩 달가운 것은 아니었겠지만, 아이들은 병아리처럼 입을 모아 시를 낭송하곤 했다. 윤동주의 생애를 간단히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게 좋을 듯하다. 윤동주는 만주 용정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여 개척과 교육에 헌신한 분이었고 아버지는 교원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가정이었다. 용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평양에서 중학 과정을 다녔다. 연희전문학교와 일본 도시샤 대학 시절 시를 썼으나 살아서 시집을 발간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사상범이라는 죄목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중 해방을 몇 개월 앞두고 사망한다. 유고 시집은 벗 송병욱의 고향 집(전라남도 광양시) 마루 밑에 숨겨져 있다가 해방 후 빛을 보게 된다. 한국 문학은 그를 ‘순결한 청년 시인’으로 기록하곤 한다. 저항 시인으로 일컬어지곤 하지만 그의 시는 저항을 외부로 향하기보다 처절한 자기 성찰의 언어로 채움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눈을 감고 내면을 응시하게 한다. 그는 숭실학교 시절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자퇴했지만 이육사처럼 의열단원도 아니었으며 독립운동에 실천적으로 참여한 행동가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 진솔했던 시인이었다. 순결한 시인이고자 했다. 술도 마시지 않던, 연애의 흔적조차 없는, 수도자 같은 심성으로 살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 시인이다. 그것은 청교도적인 집안 분위기와 결합한 휴머니즘이라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그가 남긴 시가 일제에 맞서 폭약을 들고 ‘돌격 앞으로!’를 외친 무장 투쟁의 시보다 더 오래, 더 널리 살아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독립을 바라지 않았던 것은 분명 아닐 텐데 이런 노래(또는 시)는 광범위한 사랑을 받기 어려운 모양이다. 중국의 용정, 일본의 도시샤 대학 등 윤동주를 기리는 장소는 여러 곳이 있지만 내가 찾은 곳은 여기 문학관과 윤동주 기념관이다. 충청북도 증평군의 21세기 문학관에 입주해 있는 동안 소설가 김영옥, 윤순례와 함께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도 다녀왔지만 「서시」를 새겨 놓은 시비 하나를 보았을 뿐 글로 쓸 만한 건 없다. 윤동주와 원주시가 인연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연세대학교와 윤동주의 이름을 연결 지어 거기 「서시」를 새겨 놓았을 뿐이다. 다만 내가 본 대학 캠퍼스 중에서 가장 안온한 분위기의 풍경이라는 인상이 남는다. 치악산 자락의 한 줄기, 박경리 토지 문화관이 멀지 않은 곳에 마치 엄마의 품처럼 넉넉하고 푸근한 지세에 자리 잡은 대학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학교 입구의 호수도 일품이어서 벚꽃이 필 무렵 간다면 한나절 산책이 풍요로울 것 같다. 시비는 정문에서 왼편 위의 산 언덕 소나무 숲 사이에 고적하게 세워져 있었다. 윤동주 문학관은 2012년 서울시 종로구에서 지은 것이고 기념관은 윤동주가 머물던 기숙사 건물의 2층에 마련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내에 있다. 두 관의 거리가 가까워서 함께 둘러보기 좋다. 버스를 이용하면 30분 정도, 승용차로는 20분이면 된다.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정보와 감상의 목록이 되던 시대는 가 버렸다. 스마트폰을 들고 문학관을 찾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스마트폰을 켜고 검색하면 원하는 정보를 모두 제공한다. 유비쿼터스의 시대! 언제 어디서나 수많은 정보에 접속할 수 있다. 승용차를 타고 가면 거리와 소요 시간이 제시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어떤 경로들이 있는지 열차, 버스, 지하철 등 이용 대상에 따른 정보가 제시되고, 어디로 가는 버스가 몇 분 후에 내가 서 있는 정류소에 도착하는지를 알려 준다. 이것이 기행의 맛을 감소시킨 것인지 증가시킨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정말 지식을 얻기 위해 어딘가를 찾아다니는 모습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리 많은 정보가 손안에 있다 하더라도 어느 장소에 가고 오는 과정의 느낌, 도착지에서의 감흥과 상념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로드뷰를 통해서 이미 대부분 거리와 풍경을 앉아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실제 어떤 작가들의 경우 세계의 어느 도시를 가본 것처럼 쓸 수 있다고도 하지만 정보는 산과 들과 거리가 주는 풍경의 냄새와 바람을 내 몸에 닿게 하지는 못한다. 어쨌든 첫 번째 문학관 기행은 첨단의 기계가 주는 편리함에 감탄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기차와 버스를 이용하면서 계속 스마트폰에 물어보았고 그것은 답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내 사용법이 서툴렀을 뿐이다. 윤동주에 관한 정보 또한 마찬가지다. 인터넷에 수백 권의 윤동주 논문이 올라와 있으니 윤동주를 공부하고 싶으면 노트북을 켜면 된다. 그러나 기행은 몸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은 몸의 욕구에 응답한다는 것이다. 윤동주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구하기 위해 어디론가 갈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것이 문학관에 가서 맛볼 수 있는 느낌을 대신해 주지는 못하기에 우리는 돌아다니는 것이다. 머지않아 청각과 후각을 포함한 오감을 모두 구현해주는 컴퓨터 시스템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있긴 하지만 지금 나는 내 몸을 이끌고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윤동주가 살던 곳으로! 윤동주가 거닐던 곳으로! 윤동주 기념관은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머물던 기숙사였다. 1922년 핀슨홀로 명명된 기숙사 건물을 2013년에 윤동주 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현재는 건물 대부분을 대학 법인 사무실로 쓰고 있고 2층에 윤동주 기념실을 마련하였다. 연세대학교에는 지금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들이 그대로 있다. 팔뚝 굵기의 담쟁이덩굴로 덮인 건물들이, 한반도에 들어온 초기 서양 건축 양식들을 짐작하게 한다. 기념실은 작고 깔끔했다. 모자에 주름살 하나 지는 것조차 불편해했다는 윤동주의 성격이 그러했을까? 좁은 공간에 윤동주와 관련된 자료들을 촘촘히 배치하여 그의 시와 삶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했다. 공간을 변형시키지 않고 직사각형의 실내 가운데에 유리관을 설치하고 유품과 자료들을 가공 없이 배치했다. 육필 원고, 사진, 주변 사람들의 증언, 살아서는 출판된 적이 없었던 시집, 고향 집의 기와 등등. 홀로 기념실을 둘러보는 시간은 호젓했다. 1시간 정도 둘러보는 동안 나 이외에 한 사람만 더 들렀을 뿐이다. 그렇게 한적하고 고요한 기념실이라니……. 윤동주가 들여다보았던 내면의 풍경이 그렇게 한가하고 고요했을까. 사진에서 읽히는 윤동주의 표정은 대개 쓸쓸하고 단호해 보였다.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무엇인가를 다독이는 것 같기도 했다. 웃음을 지으려다 만 듯한 표정,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막고 있는 듯 굳게 다문 입술, 고개가 약간 기울어진 사진들이 그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 시대 어느 시인의 표정에서 이런 분위기를 찾아낼 수 있을까. 기형도가 남긴 시편과 그의 표정이 그러했던가. 얼핏 두 사람의 이미지가 겹친다. 젊은 죽음, 시대의 불우, 살아서는 내지 못한 시집, 그리고 그들은 둘 다 서른 해를 살기 전에 죽었다. 윤동주는 스물아홉에, 기형도는 스물여덟에.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연세대 동문이다. 윤동주가 넉넉한 집안이었고 기형도가 유년 시절 궁핍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기념실에서 읽은 시 「병원」은 그의 쓸쓸한 표정과 겹쳐지며 더 아릿하게 가슴에 젖어 왔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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