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하순 오후. 서울시 종로구의 윤동주 문학관 앞. 연세대학교에 있는 윤동주 기념관을 거쳐 지금 막 도착했다. 창의문로의 외곽 풍경이 가까이 펼쳐진다. 윤동주 문학관 기행을 하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시는 「서시」였다. 국어 교사로 살면서 아이들에게 수없이 가르쳤고 해마다 새롭게 만나는 아이들에게 첫 번째 암송 시로 「서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수업 종이 울리고 교실 문에 들어서면서 나는 “서-시! 윤-동-주!”라고 외치며 잠시 문 앞에 서 있곤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고 암송을 시작했다.
왜 윤동주의 「서시」를 첫 암송 작품으로 제시했을까. 교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이런저런 갈등과 고통이 한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서시」는 우울한 날 혼자 읊조리며 자신을 다독거리기에 좋았으니까. 그러나 꼭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서시」만큼 무결점의 시로 꼽을만한 게 있을까 싶다. 아무튼, 언제부턴가 윤동주의 「서시」는 아이들에게 암송하게 할 첫 시로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외우기 적절한 길이, 쉬운 낱말, 내면을 향한 고요한 성찰과 다짐, 청춘의 우울과 쓸쓸함이 담긴 시어, 어둠이 스쳐 간 시대의 뒷모습, 이런 것들이 이 시의 아프지만 단단한 힘이라고 할 것이다. ‘부끄럼’과 ‘괴로움’과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요즘 세대 아이들에게 그리 썩 달가운 것은 아니었겠지만, 아이들은 병아리처럼 입을 모아 시를 낭송하곤 했다.
윤동주의 생애를 간단히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게 좋을 듯하다. 윤동주는 만주 용정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여 개척과 교육에 헌신한 분이었고 아버지는 교원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가정이었다. 용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평양에서 중학 과정을 다녔다. 연희전문학교와 일본 도시샤 대학 시절 시를 썼으나 살아서 시집을 발간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사상범이라는 죄목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중 해방을 몇 개월 앞두고 사망한다. 유고 시집은 벗 송병욱의 고향 집(전라남도 광양시) 마루 밑에 숨겨져 있다가 해방 후 빛을 보게 된다. 한국 문학은 그를 ‘순결한 청년 시인’으로 기록하곤 한다. 저항 시인으로 일컬어지곤 하지만 그의 시는 저항을 외부로 향하기보다 처절한 자기 성찰의 언어로 채움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눈을 감고 내면을 응시하게 한다. 그는 숭실학교 시절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자퇴했지만 이육사처럼 의열단원도 아니었으며 독립운동에 실천적으로 참여한 행동가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 진솔했던 시인이었다. 순결한 시인이고자 했다. 술도 마시지 않던, 연애의 흔적조차 없는, 수도자 같은 심성으로 살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 시인이다. 그것은 청교도적인 집안 분위기와 결합한 휴머니즘이라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그가 남긴 시가 일제에 맞서 폭약을 들고 ‘돌격 앞으로!’를 외친 무장 투쟁의 시보다 더 오래, 더 널리 살아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독립을 바라지 않았던 것은 분명 아닐 텐데 이런 노래(또는 시)는 광범위한 사랑을 받기 어려운 모양이다.
중국의 용정, 일본의 도시샤 대학 등 윤동주를 기리는 장소는 여러 곳이 있지만 내가 찾은 곳은 여기 문학관과 윤동주 기념관이다. 충청북도 증평군의 21세기 문학관에 입주해 있는 동안 소설가 김영옥, 윤순례와 함께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도 다녀왔지만 「서시」를 새겨 놓은 시비 하나를 보았을 뿐 글로 쓸 만한 건 없다. 윤동주와 원주시가 인연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연세대학교와 윤동주의 이름을 연결 지어 거기 「서시」를 새겨 놓았을 뿐이다. 다만 내가 본 대학 캠퍼스 중에서 가장 안온한 분위기의 풍경이라는 인상이 남는다. 치악산 자락의 한 줄기, 박경리 토지 문화관이 멀지 않은 곳에 마치 엄마의 품처럼 넉넉하고 푸근한 지세에 자리 잡은 대학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학교 입구의 호수도 일품이어서 벚꽃이 필 무렵 간다면 한나절 산책이 풍요로울 것 같다. 시비는 정문에서 왼편 위의 산 언덕 소나무 숲 사이에 고적하게 세워져 있었다.
윤동주 문학관은 2012년 서울시 종로구에서 지은 것이고 기념관은 윤동주가 머물던 기숙사 건물의 2층에 마련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내에 있다. 두 관의 거리가 가까워서 함께 둘러보기 좋다. 버스를 이용하면 30분 정도, 승용차로는 20분이면 된다.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정보와 감상의 목록이 되던 시대는 가 버렸다. 스마트폰을 들고 문학관을 찾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스마트폰을 켜고 검색하면 원하는 정보를 모두 제공한다. 유비쿼터스의 시대! 언제 어디서나 수많은 정보에 접속할 수 있다. 승용차를 타고 가면 거리와 소요 시간이 제시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어떤 경로들이 있는지 열차, 버스, 지하철 등 이용 대상에 따른 정보가 제시되고, 어디로 가는 버스가 몇 분 후에 내가 서 있는 정류소에 도착하는지를 알려 준다. 이것이 기행의 맛을 감소시킨 것인지 증가시킨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정말 지식을 얻기 위해 어딘가를 찾아다니는 모습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리 많은 정보가 손안에 있다 하더라도 어느 장소에 가고 오는 과정의 느낌, 도착지에서의 감흥과 상념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로드뷰를 통해서 이미 대부분 거리와 풍경을 앉아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실제 어떤 작가들의 경우 세계의 어느 도시를 가본 것처럼 쓸 수 있다고도 하지만 정보는 산과 들과 거리가 주는 풍경의 냄새와 바람을 내 몸에 닿게 하지는 못한다. 어쨌든 첫 번째 문학관 기행은 첨단의 기계가 주는 편리함에 감탄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기차와 버스를 이용하면서 계속 스마트폰에 물어보았고 그것은 답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내 사용법이 서툴렀을 뿐이다.
윤동주에 관한 정보 또한 마찬가지다. 인터넷에 수백 권의 윤동주 논문이 올라와 있으니 윤동주를 공부하고 싶으면 노트북을 켜면 된다. 그러나 기행은 몸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은 몸의 욕구에 응답한다는 것이다. 윤동주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구하기 위해 어디론가 갈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것이 문학관에 가서 맛볼 수 있는 느낌을 대신해 주지는 못하기에 우리는 돌아다니는 것이다. 머지않아 청각과 후각을 포함한 오감을 모두 구현해주는 컴퓨터 시스템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있긴 하지만 지금 나는 내 몸을 이끌고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윤동주가 살던 곳으로! 윤동주가 거닐던 곳으로!
윤동주 기념관은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머물던 기숙사였다. 1922년 핀슨홀로 명명된 기숙사 건물을 2013년에 윤동주 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현재는 건물 대부분을 대학 법인 사무실로 쓰고 있고 2층에 윤동주 기념실을 마련하였다. 연세대학교에는 지금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들이 그대로 있다. 팔뚝 굵기의 담쟁이덩굴로 덮인 건물들이, 한반도에 들어온 초기 서양 건축 양식들을 짐작하게 한다. 기념실은 작고 깔끔했다. 모자에 주름살 하나 지는 것조차 불편해했다는 윤동주의 성격이 그러했을까? 좁은 공간에 윤동주와 관련된 자료들을 촘촘히 배치하여 그의 시와 삶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했다. 공간을 변형시키지 않고 직사각형의 실내 가운데에 유리관을 설치하고 유품과 자료들을 가공 없이 배치했다.
육필 원고, 사진, 주변 사람들의 증언, 살아서는 출판된 적이 없었던 시집, 고향 집의 기와 등등. 홀로 기념실을 둘러보는 시간은 호젓했다. 1시간 정도 둘러보는 동안 나 이외에 한 사람만 더 들렀을 뿐이다. 그렇게 한적하고 고요한 기념실이라니……. 윤동주가 들여다보았던 내면의 풍경이 그렇게 한가하고 고요했을까. 사진에서 읽히는 윤동주의 표정은 대개 쓸쓸하고 단호해 보였다.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무엇인가를 다독이는 것 같기도 했다. 웃음을 지으려다 만 듯한 표정,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막고 있는 듯 굳게 다문 입술, 고개가 약간 기울어진 사진들이 그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 시대 어느 시인의 표정에서 이런 분위기를 찾아낼 수 있을까. 기형도가 남긴 시편과 그의 표정이 그러했던가. 얼핏 두 사람의 이미지가 겹친다. 젊은 죽음, 시대의 불우, 살아서는 내지 못한 시집, 그리고 그들은 둘 다 서른 해를 살기 전에 죽었다. 윤동주는 스물아홉에, 기형도는 스물여덟에.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연세대 동문이다. 윤동주가 넉넉한 집안이었고 기형도가 유년 시절 궁핍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기념실에서 읽은 시 「병원」은 그의 쓸쓸한 표정과 겹쳐지며 더 아릿하게 가슴에 젖어 왔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988년 『분단시대』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서로 다른 두 자리』, 저서 『선생님과 함께 읽는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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