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어려서부터 동시를 썼고 숭실중학교를 다닐 때 교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에 몰두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정지용을 찾아가 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윤동주는 문과에 입학할 때 의과 진학을 고집한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로 보아 그는일찍부터 문학에 관한 간절한 열망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윤동주가 일본으로 가서 계속 영문과에 적을 둔 것도 문학에 관한 그의 지향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원래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무렵 시집을 내려 하다 주위에서 시집 발표 때문에 생길지도 모르는 위협을 우려하여 만류하였고, 후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결국 그 시집은 해방이 된 후에서야 발행되었다. 그것도 동주가 없는 세상에서. 그 시집이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그가 일본에서 릿쿄대학교를 다니다가 도시샤대학교로 편입한 이유 중 하나가 정지용이 그곳을 다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시인의 삶을 꿈꾸었는지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가슴이 저린다. 다만 시를 사랑하였을 뿐인 순결한 청년 윤동주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채 남의 나라 땅에서 숨져야 했다. 우리는 지금 언제 어떻게 발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시를 쓰는 시인의 가슴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시 「병원」은 마치 나라 전체가 병들어 버린 현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시를 어떤 여인에 관한 사랑으로 읽는다 하더라도 그 사랑은 불가능의 단어들로 가득하다. 찾아오는 이도 없고, 나비 한 마리도 없고, 아픈데 병은 없다는 늙은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만 하는 사랑이다. 없는 것이 가득한 사랑이다. 살구나무와 금잔화 꽃 한 송이가 그 고립된 사랑의 위로가 될 수 있었을까.
윤동주의 시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쉽지만 가볍지 않고, 가볍지 않지만 우리를 지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어느 고요하고 낯선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잠시 생각하게 한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다니며 기숙사에서 머문 기간은 3년 정도, 스물두 살 때부터 스물네 살 때까지다. 한 인간의 생애 가운데 가장 빛나는 시간을 이 공간에서 살았다. 그때는 식민지 조선의 운명이 나날이 기울어 가던,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발악하듯 한반도를 옥죄던 시절이었다. 정지용의 경우 1940년대가 되면서 절필하고 글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역사상 가장 많은 파괴와 학살이 있었다는 제2차 세계 대전이벌어지던 시기였다. 윤동주가 희미한 불빛 아래 「서시」를 쓰던 때가 바로 1941년이었다. 시가 설 자리가 없던 시절에 시를 쓴것이다. 윤동주는 만년필로 시를 썼다. 그의 글씨는 그의 눈빛처럼 부드럽고, 원고지의 네모 칸을 벗어난 적이 별로 없는 음절들은 굳게 다문 그의 입술처럼 견결하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겠다는 듯이,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듯이.
기념관 앞에는 「서시」를 육필 그대로 옮긴 시비가 있다. 당시 기숙사였던 건물을 나오면 바로 앞, 윤동주가 거닐던 공간이다. 획 하나하나를 천천히 그어 간 그의 손놀림이 느껴진다. 내가 시비를 바라보며 섰던 자리를 윤동주도 거닐었을 것이다.
윤동주 문학관은 윤동주가 종로구에 살았다는 것을 근거로 종로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쓰여진 시」 등을 이곳에 사는 동안 썼다. 이 문학관은 구조로는 단연 현대적 감각을 보여 주는 곳이다. 내가 그동안 다녀 본 모든 문학관은 건물의 구조가 기본적으로 ‘집’이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상자형태다. 한마디로 집이 아니었다. 본래 상수도 관련 기계 시설이 있던 가압실과 두 개의 물탱크를 개조하여 만든 독특한 이력을 가진 건물이다. 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생애를 설명해 놓은 작은 액자들이 벽에 걸려 있고 중앙에는 용정에서 가져온 우물용 목재를 설치했다. 이곳은 사실 복제본 육필 원고 외에는 윤동주 관련 자료가거의 없다. 자료 대부분은앞서 말한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관에 있다. 그러나 1전시실에 이어진 두 개의 공간(2전시실-열린 우물, 3전시실-닫힌 우물)은 건축가의 뛰어난 감각을 맛보게 한다. 두 개의 물탱크 중하나는 영상실(닫힌 우물)로, 하나는 전시실과 영상실을 잇는 공간(열린 우물)으로 만들었는데 ‘잇는 공간’의 물탱크는 위쪽을 뚫어 하늘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묘한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그것은 어딘가에 갇혀 있는 느낌, 벗어날 수 없는 폐쇄의 공간에 놓인 것 같은 느낌이다. 눈을 들었을 때 사각의 하늘이 뚫려 있다. 윤동주의 생애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간단하게 이것이 윤동주의 시대가 주던 억압과 윤동주가 꿈꾸던 희망의 몽타주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더구나 벽에는 시멘트 물탱크의 내부에 오랫동안 쌓인 얼룩을 그대로 두어 걸어가는 동안 옷깃에 스친다. 영상실 또한 물이 찼던 시멘트벽의 얼룩 위로 영상을 뿌린다. 마치 상처의 배경에 윤동주의 삶을 보여 주면서 시대의 흔적과 관람자를 대면케 하려는 것처럼. 집을 오직 생존과 주거의 공간으로만 인식해 온 나에게 이런 경험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공간 자체를 서정과 서사의 공간으로 만들어 그곳에 들어선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흔드는 것, 그것이 현대 건축의 힘인가 싶다. 이는여행지에서 잠깐 맛볼 수 있는 경험일지도 모르지만 그여운은 오래 남는다. 내가 그동안 다녀 본 몇몇 기념관과문학관 중에서 근래에 문을 연 충청남도 부여의 신동엽 문학관, 제주특별자치도의 추사관 등에서도 바로 이런 낯선 공간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건물 뒤로 오르막이 이어지는 언덕은 서울 북서쪽을 감싸고 있는 인왕산 자락인데 종로구에서는 이곳을 시인의 언덕으로 명명하였다. 윤동주가 걸으며 내려다보았을 서울의 풍광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겨울과 봄이 겹치는 계절의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즐기고 있다. 윤동주도 이런 시간에 여기 있었을까. 그도 햇살 속의 저 풍광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을까.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내가 옥천에 살면서 정지용 문학관에 가까워지게 되고 언젠가 시인들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 첫 번째 손님을윤동주로 삼은 것은 그의 시를 가슴에 품은 뜻도 있었지만, 정지용과 그의 친연성 때문이기도 했다. 정지용이 윤동주 시집의 서문을 썼고 서로 도시샤대학 동문이라는 것, 도시샤대학에 두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는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도시샤대학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두 사람의 시 세계는 다르지만 적어도 두 시인은 암울한 시대를 건너오면서 시인의 이름을 오염시키지는 않았다는 게 어떤 위로가 된다. 그들이 죽고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대의 그늘이 말끔히 지워졌다 하기는 어려우니 어찌 그 이름이 새록하지 않겠는가. 두 시인은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일본의 왕을 찬양하면서 살아남아 오래오래 변명을 일삼던 어떤 시인들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지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에서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와 나눈 이야기를 소개한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샤쓰나 거저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끼지 않읍데다.”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수용된 지 2년 만에, 불과 해방을 6개월 앞두고 죽는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하에서 죽는다. 공식적으로 그는 일본의 신민으로 태어나 만주, 한반도, 일본에서 일본의 신민으로 살다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국어를 가장 서정적으로 만든 시인이었다. 발표할 희망도 없는 시를 쓰며 수행자처럼 묵언하는 청춘을 살다가 죽어 간 시인,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까. 다시 길을 떠나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1988년 『분단시대』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서로 다른 두 자리』, 저서 『선생님과 함께 읽는 정지용』.
전체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