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를 만난 지 25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그의 생가에 오니 그곳엔 농사꾼 시골집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뒷산을 업고 지어진 안채와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로 개조된 길가 쪽의 문간 집. 이 생가는 말하자면 전국 시인들의 생가 중에는 가장 젊을 것이다. 김남주가 태어난 것이 운명처럼 해방되던 해 1945년이니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일흔둘이다. 요즘에는 그 나이가 웬만한 경로당에서 청년 취급을 받고 있다는데, 그가 살아 있다면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안채 현판에 신영복의 휘호로 ‘민족 시인 김남주 생가’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서각 작품이 있다(‘고정희 시인 생가’는 신영복의 서체이긴 하지만 친필이 아닌 컴퓨터 한글 폰트). 안채 왼쪽으로 뒷산을 업고 세워진 김남주 흉상 옆에는 원형 벽이 있다. 그리고 거기 그의 절창 「조국은 하나다」가 철판에 새겨져 있다.
7연 80행에 이르는 긴 시다. 녹슬어가는 철판의 검붉은 색감은 비에 젖어 더욱 비장했다. 흉상 주변에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사랑은」, 「자유」, 「노래」 등 시비가 있는데 「조국은 하나다」가 주 조형물이다. 다른 시비들은 조형물에 그리 큰 노력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다. 시비의 글씨도 모두 컴퓨터 폰트의 궁체였다. 신영복이 궁체의 형식이 민중 문학의 내용을 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고 새로운 서체를 만들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가 얘기한 민중 문학의 주요 목록이 신경림·신동엽·박노해 등이었다. 신영복은 김남주의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그 특유의 민체로 썼다. 궁체가 불경을 쓰고 성경을 쓰기에는 그 우아한 분위기가 어울리지만, 그것으로 신동엽의 「금강」, 신경림의 「새재」,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쓴다는 건 유리그릇에 된장을 담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 새로운 서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나중에라도 김남주의 시비들을 다시 세우게 된다면 그때는 신영복 체로 하면 좋겠다. 지금 서울에서 또는 대전이나 공주에서 신영복 한글 서체를 공부하는 분들이 줄잡아 50∼60명은 될 것 같은데, 이들이 신영복 한글 민체를 익힌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해도 될 것이다. 시의 형식과 내용이 진화하듯 붓글씨의 내용과 형식도 진화하고 있다.
「조국은 하나다」는 사람들의 가슴을 때리며 1980년대의 기나긴 어둠에 비수처럼 날아든 시다. 그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두려움에 떨며 입조심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소시민 나에게 그 시는 섬찟한 시였다. 1959년생 내가 자라 온 한국 사회는 그런 사회였다.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교과서 내용과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간다는 현실의 공포를 함께 세뇌받아온 나에게 그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살던 동네 어른 하나가 유신 때 어떤 선거를 ‘개투표’라고 말했다가 경찰에 불려 다닌 적이 있었다. 그가 ‘개’가 한자 ‘개(皆)’였으며 따라서 ‘모두가 하는 투표’였다는 의미였노라고 주장하던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어렴풋이 어떤 모순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공포심을 내면화했다. 내가 어렸을 적 익힌 경찰의 이미지는 ‘무서움’이었다. 그 공포 언어의 목록에는 ‘순사’와 ‘상감’이라는 낱말이 있었다. 나중에 순사는 일제 강점기 용어이며 상감은 산감(山監)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 시절 산에 나무하러 갈 때마다 혹시 ‘상감’한테 들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함께 있어야 했다. 나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전까지 겨우 신문을 보며 비판적 언어에 가까스로 닿아 있었을 뿐이고 비로소 대학에 와서 ‘제국주의’니 ‘독재 타도’니 하는 언어에 닿을 수 있었다. ‘미제’니 ‘노동 해방’이니 하는 말들이 처음 내게 다가왔을 때 역시 섬뜩했다. 김남주의 언어는 내 머리에 언어의 혁명을 일으키는 회오리였고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피가 튀는 언어들이었다. 박노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5년에서 1988년까지의 시간, 김남주는 박노해와 함께 문학의 전위였다. 이른바 1980년대를 가로지른 거대 담론 NL과 PD를 상징하는 두 인물 김남주(NL)와 박노해(PD)는 모든 청년 문사들의 전설이었던 것이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세상 밖으로 내던진 시집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은 독재의 심장에 날아드는 화살과도 같았다. 숨죽이며 그 시를 읽는 나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시민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다.
김남주의 생가에는 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공간이 하나 마련되어 있는데 바로 김남주가 감옥에서 지냈던 독방을 재현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안채의 왼쪽 위로 대밭을 등지고 세워진 작은 구조물. ‘내가 수용되어 있는 사동은 소위 좌익수들이 감금되어 있는 특수 사동으로서 시멘트 복도를 사이에 두고 문패에 1.06평, 정원 3명이라고’ 하지만 ‘방에 딸린 변소(뼁끼통)를 빼면 0.7평 정도밖에 안 되’는 공간, ‘복도에서 가로 1m 세로 1.5m 철문을 끌어당기고 들어가면 비좁은 공간이 강요하는 압력 때문에 금방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공간, ‘방의 바닥이 세로가 1.5m 가로가 1m이고 천정은 2m 높이’로 ‘나같이 체구가 작은 사람도 한 방 가득 차’는 공간, ‘거기다가 방에 붙어 있는 뺑끼통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옥중연서』에서)’ 찌르던 공간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지금 화장실 냄새도 없는 그 공간에 조 선생님과 나는 서로 번갈아 들어가 보며 사진을 찍는다. 그가 「길」에서 ‘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 억압의 사슬에서 민중이 풀려나는 길이고 / 외적의 압박에서 민족이 해방되는 길이고 / 노동자와 농민이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다’라고 쓰며 투쟁의 의지를 단련하던 공간에서.
그가 유년의 천진함을 보낸 집 옆에 그의 몸과 문학과 사상을 가두었던 감옥의 공간을 나란히 대비시켜 놓은 것은 다른 문학관이나 생가에서는 볼 수 없는 김남주 생가의 특별함이다. 앞으로 김남주 문학관을 지을 계획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김남주 문학관은 김남주 생가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문학을 더 공부시킬 요량으로 몇십억의 예산을 들여 김남주 문학관을 짓고 거기 그의 삶을 담아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그가 바라던 세상의 모습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미 생가와 이 감옥만으로도 김남주 문학관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는 대나무처럼 청청하게 살다가 낫에 베이듯 스러졌다. 출옥 후 불과 5년이 지났을 무렵인 1994년,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가 많았으나 죽음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지 않으니 때가 되면 인정사정없이 데려간다. 아쉬움을 남기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마는 그의 죽음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의 삶의 선명함과 죽음의 난데없음이 어딘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인간이 누리는 보편적 수명조차 누리지 못하였고 그의 시의 전율을 더 느끼고 싶어 하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몇 가지 상념이 휘감아왔다. 문득 떠오른 것은 ‘아 김남주는 구질구질한 삶을 이어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1994년은 이른바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몇몇 운동가와 작가들의 변절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시절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형식을 갖추어가고 있었고 운동권들 상당수는 정치권으로 옮겨갔다. 1986년에서 1987년에 이르는 혁명적 열기는 직선제 쟁취로 변곡점을 지났다. 시민 사회는 변혁 운동 세력의 동력이 되어 주지 않았다. 직선제 정도로 만족한 중산층과 대중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갔고 운동 세력들은 여전히 사회 변화를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전처럼 활기차지도 신이 나지도 않았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하면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대중들은 염증과 기피를 섞어가며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시절이었다. 거기다가 김영삼이 노태우와 3당 합당을 하면서 민주주의는 드디어 기득권 세력의 장난감 정도로 가벼워지고 있었다. 김남주가 죽은 해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다음 해였다. 문민정부라 이름 붙여진 그 시절 타도해야 할 독재는 사라졌지만, 일상에서 독재의 잔재들은 아무것도 죽지 않았으며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시적이거나 폭력적인 탄압이 뒤로 숨어 들어갔을 뿐이었다. 반독재의 상징이던 김대중도 대통령 선거에 나서서 연거푸 두 번이나 떨어졌으니 이제 정부를 향한 모든 요구는 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힘을 얻지 못했다. 민주적인 제도 내에서 선거를 통해 사상의 자유도 쟁취하고 노동조합도 힘을 얻어야 하고 여성운동도 인권도 복지도 거리에서 외치는 함성만으로는 대중의 환호를 요구할 수 없었다. 근엄과 결연함과 목숨을 건 자만이 투쟁하던 시절에서 나처럼 겁 많은 소시민도 마구 정부를 비판하고 심지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대통령을 풍자해도 되는 그야말로 코믹한 시대가 된 것이다. 정치가 가벼워진 것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군부가 중심이 되던 지배 권력은 이제 자본과도 결탁하여 더 교묘한 방법으로 저항을 통제하고 길들였다. 김남주가 적개심을 불태우던 ‘미제’는 여전히 강고했고 대중들의 증오를 광범위하게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문학도 투쟁의 전선에서 서서히 퇴진해갔다. 그것은 시의 시대가 가을 산의 낙엽처럼 스러져가는 모습과도 같았다. 작가들은 다시 파편화한 개인으로 가거나 난해한 시의 골방에서 길을 잃거나 버렸다. 산문들도 ‘옛날에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 하는 후일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의 소소함이 혁명가에겐 너무나 지루한 나날들이 아니었을까.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조직도 파괴되고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부끄럽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징역만 잔뜩 살았으니
이것이 나의 불만이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싸웠다! 잘 싸웠거나 못 싸웠거나
승리 아니면 죽음!
양자택일만이 허용되는 해방투쟁의 최전선에서
자유의 적과 싸웠다 압제와
노동의 적과 싸웠다 자본과
펜을 들고 싸웠다 칼을 들고 싸웠다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나는 싸웠다
민족 해방, 노동 해방, 미제 타도 등 거대 담론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던 사람이 긴 영어의 세월에서 풀려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일상의 사사로운 일들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물론 나의 소시민적 감상이다.
돌아오는 길 나는 다시 노래가 된 그의 시를 떠올려 본다. 햇살은 없고 가을비가 심하게 차창을 때린다. 감옥 창살에 비추던 다람쥐 꼬리만한 햇살로도 가슴 따스해지던 순간이 있었던 사람 김남주 시인. 안치환의 절절한 목소리에 실린 노래를 가끔 따라 부르며 시인의 목을 휘감던 햇살을 더듬어보곤 한다.
1959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대학원 서예문화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 『분단시대』 4호에 시 「겨울을 건너는 강」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서로 다른 두 자리』, 시 해설서 『선생님과 함께 읽는 정지용』, 수업 연구서 『모둠토의수업 방법 10가지』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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