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의 흉상 앞에 섰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을 오후. 조각상은 거친 맛을 심하게 강조하여 제작되었는데, 지금 비에 젖어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다. 그의 삶이 투쟁의 빗물에 젖은 삶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광대뼈를 강조한 깡마른 모습은 스스로 ‘시인이 아니라 전사’라고 불리길 원했던 사람의 격렬함을 드러내고 있다. 조각상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 각도가 낮지도 높지도 않다. 아마 고개를 더 젖혔으면 애처로웠을 듯한데, 확고한 신념으로 목표를 향해 치닫는 사람의 형상이다. 또 다른 그의 흉상이 광주 중외 공원 비엔날레관 옆에 있다. 지난여름 들렀던 그 공원의 조각상은 여러모로 생가에 있는 조각상과 다르다. 우선 몸의 자세부터 어디에 기댄 듯 오른쪽으로 비스듬하다. 오른손을 귀밑에 대고 무슨 소리라도 들으려는 듯 고요하고 편안한 표정이다. 살이 약간 오른 얼굴에 옅은 웃음을 머금은 입가, 얼굴 피부의 겉 처리는 조각도의 흔적을 없애고 부드럽게 했다. 공원의 김남주는 눈빛 또한 따뜻하게 지상을 향하고 있어 그를 찾아온 사람의 눈과 마주하겠다는 각도다. 생가의 조각상은 안경조차 뿔테의 굵은 선을 한껏 강조했고 피부에서 띄워 놓아 자칫 건들면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반면 공원의 조각상은 안경을 피부에 닿게 안정시켜 놓았다.
몸을 부려 사는 노동자 농민을 너무 사랑해서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던진 사람! 1980년대라는 거대한 변화의 시대를 가로질러 달려갔던 불꽃! 어느 것이 김남주의 본질에 가까운 걸까. 중외 공원에는 조각상과 나란히 세워져 있는 「노래」 시비가 있고 생가의 조각상 옆에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시비가 있다. 시의 내용으로 보자면 공원에 있는 시가 전투적이다. 전투적인 조각상과 덜 전투적인 시, 전투적인 시와 덜 전투적인 조각상, 두 이미지가 교차하고 있다.
1박 2일 일정으로 나선 남도 문학 기행의 둘째 날 오후. 오전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들러보고 고정희 생가를 거쳐 도착한 김남주 생가는 먼저 본 곳과 너무도 다르다. 윤선도 유적지에 대비되는 곳으로 고정희 생가와 김남주 생가는 같은 위치에 있으리라. 대비되는 두 사물을 고찰해 보라는 듯 너무 다른 성격의 두 풍경을 보고 있는 셈이다. 고산의 집은 거대했고 김남주의 집은 초라했다(나중에 지도로 확인해 보니 김남주가 살던 봉학리 전체의 크기와 윤선도 유적지 터의 규모가 서로 10,000여 평 정도로 비슷했다!). 두 사람 다 당대와 불화하며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았으나 한 사람은 양반 집안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고 한 사람은 머슴 출신 소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감옥을 드나들며 투쟁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두 사람 다 권력과는 불화했지만 단지 양반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산은 거대한 저택과 원림 속에서 살았다. 권력 주변의 더러움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유배를 당했지만, 유배 기간 14년 5개월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녹우정과 보길도를 오가며 음풍농월하며 지내다 85세에 죽었다. 유배가 아무리 형벌이라고는 하나 일제 강점기에도 허락되었던 종이와 펜이 금지된 군사 독재 시절의 감옥과 비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김남주는 그런 감옥 생활을 9년 11개월이나 했다. 윤선도는 유배 생활 중 붓글씨로 국문학사에 길이 남는 한글 시조를 썼고 김남주는 감옥에서 칫솔을 날카롭게 갈아 우유갑이나 휴지에 시를 써야 했다. 시퍼렇게 날이 선 그 시도 국문학사가 존재하는 한 늘 거론될 것이다. 윤선도는 더 좋은 풍광을 즐기기 위해 인위적으로 숲과 산책로와 정자를 만들었다. 심지어 연못을 만들고 보기 좋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동자들에게 색동옷을 입혀 거닐게 하고 주변에 풍악을 울리게 하였다니 가히 그는 가진 자가 누릴 수 있는 오락의 극점까지 갔다 하겠다. 한 사람은 단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려서부터 뼈 빠지게 일하고 독재에 맞서 싸우다 수배되고 감옥에 갔다. 그리고 출옥한 지 얼마 안 되어 49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김남주 생가와 윤선도 유적지의 거리는 30리 안팎. 하루 사이에 이렇게 다른 두 인생 역정을 돌아보는 기행은 가을비보다 차고 쓸쓸하다.
내 글에서 다룬 시인 가운데 그가 살아생전에 내가 만나 본 유일한 인물이 김남주다. 내가 의욕적으로 쫓아다녔다면 서정주, 박목월, 조병화, 박두진 등은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20대 청년이 된 이후까지 살아 있었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를 직접 만나서 문학적인 그 무엇을 얻거나 확인할 필요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문학만 그러하겠는가. 철학자를 한두 시간 만나서 철학을 배우겠는가. 부지런히 다니면서 작가를 만나거나 강의를 듣지 않는 게으름, 또는 직접적인 관계보다 독서를 통한 만남을 신뢰하는 백면서생의 변명으로 삼기엔 궁색한 말이지만 나는 사람을 만나는 일에 별로 적극적이지 못하다. 그저 멀리서 그들의 소식을 듣고 시집을 보며 만났기에 대개 시인들의 모습은 정지된 사진의 이미지 정도로만 내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러니 내가 김남주를 생전에 한 번이라도 만난 것은 특별한 경험이라 하겠다. 그것도 네댓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며 그가 풍기는 인간적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내가 전교조나 민예총에 관계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작가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느낀 아쉬움 중 하나는 어떤 작가들의 경우 직접 만난 후 작품의 맛이 반감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관이나 생가 기행은 그렇지 않다. 시의 배경은 시를 배반하지 않는 것 같다. 시인이 태어난 집, 시인이 살던 마을, 시인이 보고 거닐었을 들과 산과 골목은 시인의 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시의 서정을 확장한다. 풍경은 시인 이전의 것들이라 그런 걸까. 윤동주의 고향 용정 가는 길에 동행했던 평론가 홍용희 교수는 ‘좋은 시는 여섯 살 이전의 언어로 만들어진 시다.’라고 말했다. 문학관이 있는 곳은 시인들의 여섯 살 이전의 언어가 가득한 풍경화다. 김남주 생가는 김남주가 태어나 살았을 어린 시절의 모습을 다른 어떤 생가보다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비록 과거의 초가지붕은 검은 양철 지붕으로 바뀌었지만, 가옥 자체를 새로 지은 것은 아닌 듯했다.
김남주의 아버지가 마련한 집은 그 아버지가 마련했던 집이다. 아버지의 성화에 날이 새기 무섭게 들판으로 일하러 가야했던 김남주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살던 집, 70세가 되어서도 밭에 나가 일을 했던, 애꾸눈 각시였던,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 대학생 때 유신에 반대하는 첫 지하신문 「고발」을 제작하여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후 29세의 나이에 돌아와 「진혼가」 등의 시를 지은 집이다. 그리고 그가 30세, 고향을 떠나 광주로 가서 서점 카프카를 개설하고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더는 고향에 와 머물지 못했다. 전사로, 시인으로, 번역가로 뜨겁게 살다 폭발하듯 죽었다.
내가 김남주를 만난 것은 1990년 무렵이었다. 영동 출신 시인이자 민예총 활동가로 당시 전국을 누비고 다녔던 양문규가 김남주를 영동에 모셔 왔다. 그 무렵 김남주는 종종 영동에 왔었다고 한다. 나까지 셋이서 박운식 시인의 집인 황간면 용암리에 들러 저녁을 먹고 용산으로 나왔던 일정이 있었다. 왜, 무슨 일로 갔는지 알 수 없고 다만 용암리에서 용산으로 나왔던 그 밤길만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추억이라고 말하면 좀 궁상스러울까. 그의 목소리는 맑았고 목 안쪽에서 나는 낭랑한 저음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성은 대체로 목 바깥쪽에서 나는 소리다. 영어는 주로 목 안쪽에서 소리가 나는데 우리말을 그렇게 발음하는 김남주 시인은 좀 특별한 경우이다. 나는 그의 음성에서 선동적인 감수성이 묻어나온다고 느꼈다. 핏대를 올리며 선동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보통의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무언가 강력한 힘을 가진 듯이 울려왔다. 지금 추측해 보니 그가 몹시 바쁜 중에 영동에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양문규가 김남주를 박운식의 집에 안내한 것은 그가 당시 농민 시를 쓰는 시인 중에 거의 유일하게 실제 농사를 지으며 사는 분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1988년 출옥 후 바쁜 일정으로 전국의 시민사회단체와 운동권 사람들, 시인, 독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중이었던 김남주의 마음에도 닿을 만한 진짜 ‘농투사니’ 시인이 박운식이었으니까 말이다. 밤길을 걸으며 나는 당시 유행했던 노래를 불렀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 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나는 그 무렵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고 있었다. 전교조 활동으로 한참 교육 운동에 열이 달아 있던 때였다. 그날 가사의 어느 부분인가를 까먹고는 다 부르지 못하고 흐지부지했다. 노랫말은 생가의 시비에 있다시피 원시와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런데 김남주의 말이 뜻밖이었다. “아, 그 시가 노래가 되았는지는 몰랐는데…….” 영동 황간면에서 용산으로 가는 밤의 들판 가운데 길이었다. 정작 시인 자신은 그런 노래가 불리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게 좀 뜻밖이었지만 그게 뭔 상관이랴. 낮고 맑은 음색의 선뜻한 그날 그 목소리는 지금도 내 귀에 쟁쟁히 살아 있다. 나중에 김남주의 육성 영상을 찾아보니 그 서늘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1988년 『분단시대』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서로 다른 두 자리』, 저서 『선생님과 함께 읽는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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