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은 낯선 이름이다. 문학계에서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문학관을 찾는 이들에게조차도 오장환은 그리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최근에는 그의 시가 대학 수학 능력 시험에도 출제되고 있긴 하지만 그동안 내가 거쳐 온 중고등학교 과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에서도 좀체 만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문학사를 기술할 때도 오장환은 그렇게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오○환’이라는 등의 이른바 금지 문인 이름에도 많이 오르내리지 않았다. 해방 직후 1947년 중학교 교과서에 그의 시 「탑의 노래」가 실렸지만, 그것이 대중의 기억에 남아 전해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낯선 이름이 나의 인식 속에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은 1996년에 오장환 문학제가 시작되면서부터다. 문학제가 치러지고 생가비가 세워지는 과정, 문학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틈틈이 그 소식을 듣고 때로 참여하기도 했다. 오장환을 시인의 길로 이끈 스승이자 옆 동네 선배였던 정지용의 경우 1988년 납·월북 작가에 대한 금기가 풀림과 동시에 바로 문학제가 열리고 뒤이어 시비가 세워지는 등 활발한 기념사업이 전개된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해금된 지 8년이 지나서야 문학제가 시작된 것도 그렇고 문학관이 2006년에야 개관한 것만 보아도 문단 안팎에서 오장환에게 보낸 관심이 그리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활동했던 서정주나 이상, 이육사 등에 비하면 턱없은 무명이었다. 더구나 그는 당대에 ‘문단의 새로운 왕’이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주목할 만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 주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른바 해방 공간에서 북한을 선택하여 간 ‘월북 작가’에 포함된 경우, 말하자면 논란의 시비가 없이 확고한 ‘빨갱이’였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모두 입을 다물어야 안전한 시절이었으니까. 다른 하나는 인기 있는 작품이 없었다는 것, 오장환 문학이 이룩한 성취가 특별한 것이긴 하지만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준 작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른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6·25 전쟁 후 오장환의 이름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82년 오송회 사건 때였다. 간단히 말하면 ‘죄 없는 시민을 빨갱이로 만든’ 사건이었다. 불길한 이름은 계속 불길한 이름으로 남한 사회에 각인되었다. 말하자면 근대의 시작과 함께 불온했고 21세기인 지금까지 ‘빨갱이’는 불길한 단어이다. 그 단어는 조선 시대의 어휘 ‘반역자’의 현대 번역어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 낙인용 어휘는 ‘종북’이나 ‘포퓰리즘’이라는 명찰을 달고 계속 우리 사회를 들쑤시고 있다.
아기의 입놀림을 ‘옴줄옴줄’이라고 원고지에 펜을 꼭꼭 눌러 썼던(「애기 꿈」) 손, 누나가 그리워 살구도 따 먹지 않고 한나절 가슴 저리던(「편지」) 서정을 우리는 영원히 곁에 두기 어려운 걸까. 저 섬세하고 여린 감수성의 문장이 체제에 불온한 걸까. 정치 권력은 영원히 그 어느 한편에 ‘불온’이나 ‘가상의 적’을 만들어 놓고 싶은 모양이다. 까발려진 들 체제에 별 영향도 없는 것들을 ‘불온’으로 과대 포장하고, 실제보다 훨씬 크게 부풀려진 ‘가상의 적’을 수시로 꺼내 들면서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내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나 보다. 그런데 이승만을 추종하는 세력이 보기에 좀 기분이 나빴는지 모르지만,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이 교과서에 실린 이후에도 남한 사회는 별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다.
동시, 산문시, 자유시 등 작품마다 내용과 형식을 조금씩 달리하긴 했지만, 오장환은 일관되게 인간을 위한 문학을 우선했다. 그는 ‘참다운 인간’의 시선으로 시대와 사회를 보려 했다.
공장 속에선 무작정하고 연기를 품고 무작정하고 생산을 한다.
끼익 끼익 기름 마른 피대가 외마디 소리로 떠들 제
직공들은 키가 줄었다.
어제도 오늘도 동무는 죽어 나갔다.
켜로 날리는 먼지처럼 먼지처럼
산등거리 파고 오르는 토막들
썩은 새에 굼벵이 떨어지는 추녀들
이런 집에선 먼 촌 일가로 부쳐온 공녀들이 폐를 앓고
세멘의 쓰레기통 룸펜의 우거(寓居)―다리 밑 거적때기
노동 숙박소
행려병자 무주시(無主屍)―깡통
수부는 등줄기가 피가 나도록 긁는다.
- 「수부」에서
장시 「수부」의 한 곳, 수부란 서울을 말함이다. 도시로 몰려든 농촌 이탈민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를 그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하 1930년대 후반 서울은 공장이 늘어나고 인구가 급격히 불고 있었다. 오장환은 어둡고 풍자적인 어조로 도시의 비참함을 그렸다. 이 시를 쓸 때 그의 나이 열 아홉. 천재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그 나이에 전쟁을 묘사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지금의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얘긴데 전쟁을 그렇게 그리고 있었다니! 인간의 목숨과 캠플 주사(심장마비 방지 주사)가 동격으로 취급되는(「전쟁」) 모습, 그가 읽은 시대와 인간 세상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아수라였던가.
오장환이 집중한 것 가운데 전통 사회의 모순과 동시에 전통 사회의 따뜻함이 있다. 신분 사회의 부조리와 여성 억압의 허위성을 파헤치거나 족보와 가부장제를 존숭하는 전통 사회의 허상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라고 「성씨보」에서 노래하고, 「정문」에서는 유교적 가치가 조선 땅에서 어떻게 일그러져 한 여인을 자살로 내몰고 지배층은 그 위에 다시 어떤 야만을 행하는지 보여 준다.
그리고 어느 인간이 안 그러랴마는 오장환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가 해방 공간에 펼친 열렬한 인민 문학 운동과 이상 사회를 향한 열정적인 활동은 전통 사회에서 경험한 따뜻함, 곧 어머니로 표현된 희생과 헌신의 사람들에게 올린 헌사이다. 기존 전통 사회의 현장인 고향은 모순이 가득 찬 곳이지만 그 모순의 질곡을 지고 살아가는 어머니는 늘 희생과 온화의 얼굴로 오장환을 감싼다.
오장환은 자신과 자신의 시가 어떤 운명을 걷게 될지 예측했을까. 해방과 함께 오장환은 해방 전에 쓰던 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열정적으로 현실주의 문학에 매진한다. 새로운 나라 건설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해방의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모순의 족쇄가 가득하던 식민지가 끝나고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걷어낸다면 그곳에 전쟁도 없고 신분 차별도 없고 노동의 소외도 없는 모두가 행복한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에 전율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해방 공간에서 그의 열정적인 활동은 극우의 테러를 당하고 결국 오장환은 북한을 선택해 간다.
북한으로 가면서 남한에 대한 기대를 접었을 테니 그는 적어도 북한에서 시집 『붉은 기』를 낼 때까지는 제 죽음과 함께 자신의 시가 북한 문학사에서 그렇게 깨끗하게 지워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되레 그가 버리고 떠난 남한에서 그의 기념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가 북한을 선택하여 갈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당시 북한이 그를 받아들일 만큼의 ‘인민’ 중심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었고 남한은 ‘자본’ 중심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북한은 인민의 범위를 점점 좁혀 들어가 그가 찬양했던 중심 권력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제거하면서 임화를 비롯한 월북 문인들을 숙청하고 그들의 작품조차 지워버렸다. 오히려 자본의 파이가 커진 남한은 인민의 힘도 함께 커져서 이제 오장환의 ‘인민’ 정도는 품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98살이다. 지난주(9월 22일~23일) 오장환 문학제가 열렸다. 2018년 탄생 100주년 문학제가 준비되고 있다. 그의 빛나는 감수성은 지금 어디 있는가.
1988년 『분단시대』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서로 다른 두 자리』, 저서 『선생님과 함께 읽는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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