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유일한 월북자의 문학관. 6·25 전쟁 전에 월북하여 북한에서 죽은 시인의 문학관이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에 있다. ‘오장환 문학관’이다. 오장환 문학관에 관한 설명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다양한 반응을 동시에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오장환 문학관은 오장환의 ‘문학’을 기리는 곳이다. 오장환의 말처럼 제대로 된 문학은 ‘문학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문학’이고 우리는 그 ‘인간을 위한 문학’을 오장환의 문학 작품 속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좀 특별한 기행이었다. 그동안 주로 혼자 가거나 몇 사람의 지인들과 동행했다. 이번에는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모았다. 처음엔 대전의 시민 단체 레츠(대안 화폐 운동을 하는 문화 공동체) 회원들과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옥천과 대전 그리고 청주에서 참가한 사람들이 있어 스무 명이 좀 넘었다. 교사, 만화가, 건축학과 교수, 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최근에 동학 관련 책을 낸 고은광순 씨(옥천군 청산면 귀촌)가 참여해 보은군과 동학에 관해 잠시 설명해 주셨다.
오장환 문학관에는 임선빈이라는 수필가가 있다. 오장환 문학관이 만들어진 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그곳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다. 마치 오장환의 연인처럼 엄마처럼 거기 살고, 문학관 방문객들을 애인이나 자식이라도 맞이하는 듯이 반긴다. 직접 따 만든 국화차를 끓여 내오거나 직접 기른 옥수수, 감자, 고구마를 쪄 내오는 일이 어찌 간단한 일이겠는가. 더구나 그는 문학관 주변을 직접 관리하고 가꾼다. 전국 문학관 어디에도 이런 예는 없다. 대개의 문학관에는 업무를 보는 분들이 계시다. 멋있게 해설하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분을 만날 수는 있지만 방문객을 자신의 낭군처럼, 집 떠난 자식이 돌아왔을 때 반기던 어머니처럼 맞이해 주는 곳이 있던가. 이번에 갔더니 밖으로 떠돌다 돌아온 탕자를 맞듯이 마당에 가득한 해바라기가 환하다. 그리고 그 해바라기를 심고 가꾼 임선빈 씨가 해바라기보다 더 환하게 문간에서 나와 방문객들을 맞는다. 오장환이 「다시 미당리」에서 노래한 어머니의 모습이 이와 비슷했을까. 오장환 문학관은 그래서 사람이 살고 있는 집과 같다.
이번 방문 전 나는 오랜만에 사전 연락을 드렸다. 미리 연락을 하고 가면 너무 융숭하게 환대해 주시는 게 좀 부담스럽고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연락을 안 드리고 깜짝 방문을 했던 적이 있는데 얼마나 화를 내시는지 무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옥수수를 한 소쿠리 쪄 내오시지 않았던가. 나는 다시 감동하면서 부담과 압력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스물이 넘는 우리 일행이 모두 두세 개씩이나 먹고도 남는 양이었다. 다음에 갈 땐 연락을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거 원. 임선빈이라는 사람이 있어 오장환 문학관은 살아있고 오장환 생가는 진짜 살아있는(生) 집(家)이 되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지금부터 40여년 전에 회인면에 온 적이 있다. 나는 구미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방학을 이용해 같은 반 친구를 찾아 왔던 것이다. 얼마 전 그 친구와 소식을 주고받으며 확인했더니 공교롭게도 현 오장환 문학관 자리가 그 친구의 집터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문학관 자리에 40여년 전 내가 왔었다는 얘기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내리다 친구의 집에 닿았던 기억이 있다. 전에 와서 하룻밤을 머문 옛 친구의 집과 문학관이 겹쳐지는 곳에 들어서는 그 묘한 심사라니!
산골 마을이다 보니 마을의 환경이 대도시처럼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문학관 주변의 집들 가운데 여전히 예전의 돌 담벼락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도로가 넓어지고 차가 늘어나고 시멘트 건물이 생기고 젊은 사람들이 떠나가는 등의 변화는 우리나라 모든 마을이 겪은 변화이지만 이곳은 지금도 궁벽진 시골 마을이다. 몇 년 전 청주―상주 간 고속 도로가 뚫리면서 회인 나들목이 생기고 교통이 편리해지긴 했다. 그래도 옥천군에서 회인면에 닿으려면 해발 300미터가 넘는 수리티재를 넘어 한 시간 가까이 차를 달려야 한다. 안남면을 거쳐 가는 동안의 산세도 그리 얌전한 것만은 아니다. 40년 전 이곳에 오기 위해 아마 나는 하루를 다 소비하지 않았을까. 청주시로 갔는지 보은군을 거쳐 갔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다만 비탈길을 내려가는 버스에서 바라보던 언덕 아래 초가집 풍경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뭘까. 그때까지 그렇게 큰 산을 버스로 넘어 다닌 적이 없었다는 게 한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나는 그 나이 때까지 내가 살던 곳 옥천을 벗어난 적이 전혀 없는 촌놈이었다. 수학여행으로 서울의 남산과 경주의 불국사를 다녀온 것이 내 여행의 전부였던 것. 오장환이 살던 당시 이곳은 내륙의 오지 중 오지였고 그래서 더 평화롭고 아늑한 곳이었으리라.
마을 앞으로는 피라미 몇 마리가 아이들을 유혹할 만한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동북쪽 국사봉과 구룡산 사이에서 흘러오는 물이다. 박인환의 고향 강원도 인제군과 같은 험준함은 아니지만 오장환의 고향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오장환이 이곳에 산 것은 보통학교 3학년 때까지다. 그때 그의 성적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미술 쪽이었다고 한다. 그가 10살 때 온 가족이 이곳을 떠나 오씨의 선산이 있는 집성촌 안성으로 간다. 그곳에서 박두진과 한반이 되어 안성보통학교를 다니고 14살 때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운명의 정지용을 만난다. 오장환의 생애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잦은 이동이다. 이는 그의 시에서 보헤미안의 감성으로 나타난다. 그는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18살에 일본으로 간다. 19살에 다시 서울로 왔는데 20살에 다시 일본 명치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것도 중퇴하고 21살에 다시 서울로 온다. 23살에 다시 일본으로 갔다가 얼마 후 되돌아온다. 18살 때 처음 일본에 가서 다닌 학교는 지산중학교라고 하는데 1년짜리를 수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교 생활도 전반적으로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도 당시로서는 아주 늦은 30살에 하게 되는데 서정주는 오장환이 스무 살 때 1년 정도 살았던 여인이 있었다는 증언을 했다는데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고 한다. 그의 삶에 어떤 알 수 없는 떠돎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떠남과 돌아옴의 이미지, 방황이나 방랑하는 자의 눈으로 보는 세상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 안착하지 않은 것 같은 쓸쓸함, 그가 어떤 대상을 향하여 격렬하게 환호하며 지지를 보내는 정서는 해방 후 북한, 러시아를 거치는 기간에 쓴 시들에 나타난다.
어린 시절은 그리 궁핍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휘문고보 다닐 때 수업료를 내지 못해 정학처분을 받을 것을 보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고급 취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돈을 다른 곳에 탕진했거나 집안이 어려워졌을 수 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직접 돈을 벌어야 했고 신문 배달도 했다고 한다. 그가 가진 직업은 남만서방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한 것 정도였는데 여기서 서정주의 『화사집』과 김광균의 『와사등』이 나왔으니 문단에 중요한 시집을 낸 셈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오장환 사진이 한 장 있다. 큰 깃을 가진 두툼한 외투 속, 얼굴의 각도가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채 포마드를 바른 듯 단정히 빗어 올린 머리와 넥타이. 지금은 보기 힘든 스타일이다. 오장환은 잘생겼다. 요즘말로 하면 꽃미남이다. 이미 죽어 없어진 사람의 얼굴을 그것도 사진을 보고 말하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오장환은 예쁘장한 귀공자 얼굴이다. 성격파 배우 역에 알맞을 김수영이나 시원시원한 북방의 남성성을 풍기는 백석, 미남형이지만 눈꼬리가 쳐진 박인환과는 차별되는 도도함과 귀여움이 오장환의 얼굴에 있다. 윤동주의 눈빛에 서린 슬픔의 그림자도 그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삶은 꽃처럼 아름답지도 않았고 귀공자처럼 귀함을 받지도 못했다. 그는 방황하며 때로는 현실과 싸우며 치열하고 뜨거운 순간들을 살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34살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러나 그는 대체로 현실적, 개인적 호사와 욕망에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던 같다. 이 세상과 사회를 보다 이상적인 어떤 곳으로 바꾸어야 하고,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민한 촉수로 자신의 시대 대부분의 조건들에 관해서 날선 비판의 시를 쓰며 이상적인 그 무엇을 위해 고민했다. 그는 신분을 차별하고 여성을 억압한 봉건 이데올로기, 식민지 현실, 제국주의, 전쟁, 근대 도시의 비인간성을 비판했다.
스무 살 무렵 ‘문단의 새로운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해방 전 글 속의 오장환은 대체로 쓸쓸했다(모든 왕들이 쓸쓸했나?). 1940년대 민족의 암흑기엔 글을 쓸 수 없었고 해방 후에는 열렬히 현장 문학에 매진했으나 곧 극우의 테러를 피해 북한으로 가야 했다. 병든 몸을 치료해 준 북한 정권은 그에게 축복이었고 치료차 갔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에 열광했지만 곧이어 닥친 6·25 전쟁은 그의 몸을 돌보기엔 너무 혼란한 격류였다. 그가 죽고 전쟁이 끝난 후 남한에서는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그에 관한 금기를 풀었고 차츰 다양한 연구와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도 북한에서는 그의 문학을 별로 취급하지 않고 있으며 이름 석자 거론하는 정도라고 한다(하긴 우린 지금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다. 아! 나도 깜빡 잊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남(연합군)과 북(중국)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또는 정전) 상태다. 대한민국은 협정에 서명도 안했다.).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예 흙이 향그러
단 한번
나는 울지도 않었다. (중략)
단 한번
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나의 노래」 중에서
그의 노래는 끝난 것일까. 지금 그의 무덤은 어디이며 거기 꽃은 피었을까. 어둡거나 쓸쓸한 기색 없던 그의 얼굴 어디에 그의 짧고 격렬한 삶의 이력을 겹쳐 볼 수 있을까.
1988년 『분단시대』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서로 다른 두 자리』, 저서 『선생님과 함께 읽는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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