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폭풍 몰아치는 사막을 걸어
너는 갔다
모래바람에 묻혀 지워지는 너를 보았다
생을 향해 이글거리던 완전 연소의 불꽃으로
연기도 재도 남기지 않은
그리하여
네가 가 닿은 곳은 어디냐
바람이 분다
너의 숨소리를 듣는다
뜨는 별에서 네 눈망울을 본다
네 미소로 해가 솟는다
여기에 네가 있었구나
비로소 네가 닿은 그곳이 여기 우리 가슴인 것을 알겠다
너는 이 세상 우주에 가득하구나
초록으로 오는구나
눈으로 오는구나
가랑비가 되어 오는구나
살아야 할 이유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알려주듯
지금은 없는 네가 내 곁에 있구나
내 안에 있구나
헤어짐은 이렇듯 하나가 되는 일이었구나
우리 갈 길이 모래 폭풍 속일지라도
이제 못 갈 일도 없겠다
너 내 안에 숨 쉬고 있으므로
나 오늘 다시 창문을 연다
내일은 네가 뿌린 씨앗들에 물을 주겠다
- 복효근, 「다시 창문을 열며」
*계산여고 이정희 선생님의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3월 20일 새벽 두시 반에 사랑하는 막내 여동생이 어린 두 딸을 두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화장장에서는 꽃을 시샘하는 봄눈치고는 꽤 많은 함박눈이 펑펑 흩날렸습니다. 딱 2년 전 3월 20일 쯤, 계산여자고등학교로 옮기고 3학년 3반 아이들의 담임이 되어 정신없이 바빴던 그 때 동생이 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수업 때문에 바로 동생에게 달려가지도 못하고 교무실에서 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주변 선생님의 염려도 귀에 잘 들리지 않고, 아이들의 걱정스러운 눈동자들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동생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도 잘 알지 못했지만, 모두들 정신을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장녀인 내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제부가 동생을 데리고 여기저기 병원을 옮겨 다닌 끝에 그렇게 생소한 급성 T림프성 혈액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엄마, 아빠와 저 그리고 둘째 여동생은 걱정과 염려와 슬픔으로 남겨진 어린 아이 둘을 돌보고 돌아가며 병원에 가서 간병을 하며 보냈습니다. 고 3 담임으로 아이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여학생들이라 예민한 감정을 많이 다독여 주어야 했지만, 병원에 가서 아픈 동생을 보고 오면 쓰라린 가슴 때문에 수업 시간에 이별시라도 가르칠 때면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습니다. 1년 동안 제 슬픈 감정으로 주변이 우울해 지는 것 같아 3학년 3반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교무실에서도 다른 선생님들께 너무 미안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졸업식에서 바라 본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밝지 못한 것 같아서 씁쓸하고 마음이 아파, 울면서 아이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아픈 마음을 배려해 주어 작년에는 담임을 맡지 않았습니다. 동생도 항암을 끝내고 골수 이식을 하고 왠지 희망이 생기고 해서 암이 재발하기 전까지 새로 맡은 새학년의 아이들에게 정도 듬뿍 주고 학교에서는 동생의 일을 잠깐 잊고 웃으며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동생이 금방 암이 재발되고, 바쁜 와중에 제부가 살려 보려고 한국의 큰 병원을 다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저도 사람인지라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해도 금세 일희일비하는 제 자신을 보며 자탄하다가도, ‘냉정해지자, 슬픔을 극복해 내던 많은 이들처럼 내게 일어난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설마 아직 내 동생은 너무 젊은데 이겨내겠지.’ 이러며 스스로 달래보고, 동생의 투병 생활에 힘이 되려고 주말이면 부지런히 동생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두 해 동안 저는 제가 시간을 앞질러 가는 것 같았습니다. 충격이 크신 엄마, 아빠도 걱정되고, 어린 조카들도 걱정되고, 고만고만한 두 아들을 키우는 둘째 여동생도 걱정되고, 일하랴 병간호하랴 자기 몸을 못 챙기는 제부도 너무 걱정되었습니다. 항암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나면서 슬슬 병원비도 걱정되기 시작하고, 일흔이 넘으신 부모님도 걱정되었지만, 가장 걱정이 됐던 것은 막내 동생이 병원에서 그렇게 오래 입원하고 치료하고 다시 이식 받고 하는 반복의 과정에서 자꾸 더 아파지고 입원 기간도 길어지고 더 항암을 할 수 있는 체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는 계속 두 달밖에 남지 않았어요라고 하지만 동생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을 위해서 그 무시무시하게 아프다는 항암을 마지막까지 받아가면서 정말 살고 싶어 했습니다. 엄마 품이 아직은 너무 그립고,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둘째 다인이를 조금만 더 키워 놓고 갔으면 하던 힘없는 동생의 목소리,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자신의 생명이자, 보물이자, 사랑이라고 말하던 첫아이의 이름을 말라비틀어진 혀로 ‘이랑아이랑아이랑아’라고 외쳐 부르던 소리가 아직도 제 귀에 선명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살고 싶어 하는 동생에게 차마 더 살 수 있다고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기만하는 것 같아서.. 그러나 지금 후회합니다. 방학 동안에 같이 있으면서 더 잘 해 줄 걸. 아프기 전에 동생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도와 줄 걸. 사랑한다고 더 많이 얘기해 주고 아직도 나 예쁘냐고 물을 때 당연하지 네가 제일 예뻐라고 진심을 다해 말해 줄 걸. 개학이 되어서 학교로 돌아갈 때 동생이 그렇게 붙잡았는데, 가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가버리라고 하니 진짜 그냥 와 버린 것이 죽을 것처럼 가장 후회됩니다. 올 3월만이라도 그냥 함께 있어 줄 걸. 나중에 팔, 다리가 모두 마비되고, 혀도 안 움직이고 급기야는 눈도 멀고, 대뇌까지 암이 퍼졌다고 했을 때는 이미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아파보이는 동생이 불쌍하고 가엾어서 가만히 동생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지었습니다. 이제 가도 돼 정희야.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너무 이기적이고 무능했던 언니가 너무 미안하고, 정말 사랑하고 우리랑 살아줘서 고마워. 우리 가족들 모두 너를 사랑하고 이제껏 표현하진 않았지만 네가 태어날 때부터 널 사랑했었어. 더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손 쓸 수 없는 순간 숨이 한 고개 두 고개 넘어 갈 때 네가 하루라도 더 살 수 있기를 희망하지 못해 미안해. 네 아픔의 일도 나눠 갖지 못하고 내 아픔에만 괴로워해서 미안해. 동생이 잠깐 저를 보고 웃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후에 먼저 가 있어라. 나도 가마. 그때 널 꼭 찾을게. 그러며 피딱지가 앉은 동생의 마른 입술에 놓여 있던 거즈가 무거워 보여 들어내는 순간 동생은 마지막 숨을 삼켰습니다. 그 순간 목 놓아 울고 싶었는데, 쉰 목에서는 제 맘처럼 소리도 나와 주지 않았습니다.
만 서른여섯 너무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정말 착하게만 살아온 동생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만 남았습니다. 아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지만 그냥 또 살아있는 죄로 살아갑니다.
학교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즐거운 척, 신나는 척 이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래도 가끔 우울한 그림자가 가득해도 표 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저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나 봅니다. 솔로로 살며 늘 철이 없던 내가 언제 어른이 되나 했더니.. 흰머리 듬성듬성해진 사십 대 중반에 인생에서 가장 큰 사막을 건넌 듯합니다. 앞으로도 건너야 할 모래 폭풍이 인생에 많이 남았겠지요. 수많은 시에서 보았던 이별의 성숙을 이뤄 보려고 애쓰며 참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깊고 넓어진 마음으로 대하려고 합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 지 생각해 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하며 더 좋은 선생님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아직은 가슴의 구멍이 커서 감정이 들쑥날쑥 한데, 그냥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좋은 우연이 인연으로 되어 만난 선생님께 글을 띄웁니다. 감정이 복받쳐 쓴 글이라.. 좀 엉망입니다. 그래도 좋은 시로 만들어 주신다니 평생 보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좋은 기회를 주시고 좋은 인연을 맺게 해 주신 창비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6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전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1년 『시와시학』 겨울호에 시 「새를 기다리며」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마늘촛불』, 『따뜻한 외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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