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었어도 좋았을 바다가
나에겐 있지
파도가 높은 그 바다는
바람이 거센 그 바다는
외할머니와 나를
나와 엄마와 아빠를 나눠놓는 그 바다는
눈물로 가득 차 있었어
때로 눈물이 피보다 더 진하다는 것 알아
바다가 아니었으면 우린 눈물을 몰랐을 거야
그런데 그 눈물의 바다가 우리를 나눠 놓는 줄 알았는데
그리움으로
안타까움으로 출렁이는 바다 때문에
우린 더욱더 하나가 돼
바다 멀리 있으면 사랑도 먼 줄 알았는데
사랑의 영토는 바다만큼 넓어져
바닷가 바위처럼 우뚝하고
거센 파도를 견딜 만큼 단단해져
그 힘으로 난 싸구려 제빵 기구에 꿈을 구웠지
없었어도 좋았을 바다 덕분에
내 꿈에 날개를 달고
파도를 넘어
거센 바람을 뚫고 그곳이 일본이든
한반도 어느 곳이든 날아갈 거야
- 복효근, 「바다 저 너머」
* 정광고등학교 정주옥 선생님께서 신청한 사연을 읽고 쓴 시입니다.
나는 12살이 되기 전까지 아빠와 떨어져 살았다. 그런다고 해서 부모님께서 이혼하신 건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일본 사람이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한국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화를 내시는 외할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한국으로 온 뒤, 아빠와 결혼하셨다. 엄마는 한국어를 독학하셨다. 그만큼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남성과 결혼을 한 뒤 외할머니께 자랑스러운 남편을 자랑하고 싶어 아빠를 데리고 일본에 가기로 했다.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그냥 한국에서 평생 살고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지만 약간의 기대를 하신 듯했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외할머니를 찾아갔다. 엄마는 외할머니께서 아빠를 싫어하시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외할머니는 오히려 아빠를 반겨 주셨다. 그 당시 아빠는 엄마와 결혼한 뒤 일본어 공부를 막 시작해서 일본어가 서투르셨다. 외할머니는 아빠의 그런 모습이 귀엽다며 아빠에게 많은 대접을 해 주셨다. 그렇게 엄마, 아빠는 일본에서 지내다가 오빠가 태어났다. 그리고 2년 후 엄마와 아빠는 외할머니와 오빠를 데리고 아빠의 여동생들이 있는 광주로 갔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엄마는 나를 낳으실 때 내 머리가 아래로 향해 있지 않고 위로 향해 있어 제왕절개를 하였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심한 목감기에 걸려있으셔서 제왕절개를 하신 뒤 기침을 하실 때마다 배에 힘이 들어가 상처가 벌어져서 고생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1년 뒤 나와 오빠와 엄마만 일본에 다시 돌아가고, 아빠는 일본에서 일을 못 하시기 때문에 한국에 남으셨다.
오빠와 나에게는 조부모가 외할머니 밖에 안 계셔서 엄마의 엄마가 계시는 일본으로 간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외할머니 집에서 200m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서 살게 되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정말 힘이 넘치며 밝은 성격이어서 자주 날뛰었다고 한다. 나는 외할머니 집에 매일 같이 놀러 가 외할머니 집에서 날뛰고 어지럽히다가 치우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말썽꾸러기였다. 초반에 외할머니는 귀여운 손녀가 하는 일은 모든 게 귀엽다며 좋아하셨지만 매일 같이 날뛰는 나에게 지쳐 멀리 이사 가라고 버럭 화를 내셨다. 우리는 할머니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1시간 또 버스 타고 1시간 걸리는 먼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오빠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엄마 혼자 돈을 벌다 보니 가정형편이 어려워 오빠에게 용돈을 많이 못 주고 우리에게 과자를 자주 사 주지 못하셨다. 오빠는 과자를 아껴서 나에게 주곤 했다.
우리 집과 달리 외할머니의 집은 2층 주택에 정말 넓어 집에 복도도 있고 여름방학이면 외할머니집의 옥상에서 바비큐를 하거나 불꽃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주 아팠던 나는 일하는 엄마 대신 외할머니 집에 맡겨져 휴양을 하게 되었고 한동안 외할머니 집에서 지냈다가 다시 집으로 가곤 했다.
아빠는 4년, 6년에 한 번씩 일본에 와 주셨다. 아빠가 오신 첫날에는 내 아빠지만 어색하고 불편하여 내키지 않았지만, 하루가 지나면 금방 친해져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아빠가 일본에 있을 수 있는 기간은 고작 1주일 밖에 없어 즐거운 시간도 금방 지나가 버리고 아빠와 공항까지 가고 헤어지기 직전에 나는 눈물이 나 공항 한가운데서 오열했다. 아빠와 엄마, 오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마음을 꾹 참고 웃는 얼굴로 헤어지려 했지만, 매번 내가 우는 탓에 눈물이 나 버렸다고 한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일본에 놀러 오셨을 때 외할머니와 엄마와 아빠가 진지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그리고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몇 달 뒤 우리는 한국에서 살게 되었다. 한국으로의 이민이 급하게 정해진 일이어서 일본 친구들과 이별 파티를 하고 외할머니는 최대한 우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리가 한국으로 갈 때까지 우리 집에서 보내셨다. 나는 한국으로 이사를 하기 싫었지만, 오빠는 좋다며 방방 뛰어다녔다. 그리고 2010년 4월 2일에 오빠와 나는 한국으로 갔다.
엄마는 조금 더 정리할 것이 있다며 6월에 간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엄마가 다시 한국으로 가버린다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셨다. 할머니는 엄마의 손을 꽉 잡고 가지 말라며 우셨지만, 엄마는 할머니를 일본에 두고 가셔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 네 가족은 한국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다문화학교였다. 우리가 일본에서 다니던 학교는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학교였지만 한국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이거 얼마에요.’말고 다른 단어들은 아예 몰랐다. 그러다 보니 5학년 때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않고 오직 한국어만 달달 외우는 식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6학년 때 일반 학교에 갔지만, 공부에 잘 따라가지 못해 고생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많은 친구를 사귀고 잘 지냈지만 1학년 겨울에 친했던 친구들이 갑자기 내가 싫다며 학교 폭력을 가했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지만, 나한테도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며 조금 더 있으면 다시 화해하고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며 위로를 해 주셨지만 화해하기는커녕 그 무리는 학교가 끝난 방과 후에 나를 따로 부르고 욕을 하고 SNS에 ‘한국에 왜 왔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라.’라는 글을 올리고 단체 대화방에 나를 초대하여 심한 욕설을 퍼붓고 부모님의 욕까지 했다.
나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우울해져 집에서도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나를 본 오빠는 부모님께 내가 이상하다고 말을 하고 내가 학교 폭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들은 신고하라며 화를 냈지만, 나에게는 아직 한 명이지만 나를 받아 주는 친구가 있어 2학년 때까지 참기로 했다. 그 친구가 지금의 절친이다.
그렇게 죽고 싶을 정도의 힘든 시간이 지나고 2학년에 올라갈 때쯤 그 무리는 하나둘 흩어져갔다. 그리고 2학년, 3학년 때는 아무 문제 없이 다른 친구들과 즐거운 학교생활을 만끽했다. 정말 어릴 때부터 제과제빵사가 꿈이었던 나는 제과제빵 학과가 있는 특성화고에 가려 했지만, 성적이 안 돼서 그냥 인문계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3학년 여름방학 때 거의 4년 만에 일본으로 갔다. 외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뵈려고 갔었다. 오랜만에 뵌 외할머니는 우리를 정말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병도 많이 나아지셨다. 며칠 동안 일본에 있던 친구들도 만나고 너무나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대학 진학을 해야 하는 고3이 되었는데 성적은 오르지 않고 넉넉하지 않은 가정 환경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손재주가 있었던 나는 제과제빵을 하는 직업반으로 빠지려고 했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공장에 가서 한쪽에 싸구려 오븐 기구를 장만하여 혼자 제과제빵 하는 연습을 하곤 했다. 직업반으로 가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2학년 때 일본어를 가르치는 담임 선생님과 상담 끝에 대학에 가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지금은 보충도 듣고 야자도 하고 심지어 토요일에 나와서 자율 학습도 한다. 내 인생 처음으로 공부를 해본다. 비록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과 내 꿈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마음먹었다.
196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전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1년 『시와시학』 겨울호에 시 「새를 기다리며」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마늘촛불』, 『따뜻한 외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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